세계의 명시 640

파울 첼란(Paul Celan)

흑암 저희가 가까이 있나이다, 주여. 잡힐 듯 가까이. 이미 잡혀서, 주여, 저희가 하나하나의 몸이 당신의 육신인 듯, 서로를 움켜쥐고 주여. 기도하소서, 주여 저희에게 기도하소서 저희가 가까이 있나이다. 바람에 뒤틀린 채 저희가 갔습니다 향하여 갔습니다. 물 괸 웅덩이와 분화구를 찾아 몸을 굽히려고. 물 마실 곳으로 갔습니다, 주여. 피였습니다, 그건 당신께서 흘리신 피였습니다, 주여. 그것이 반짝였습니다. 그것이 우리 눈에 당신의 형상을 비추었습니다, 주여. 눈과 입이 저렇듯 열려 있고 비어 있습니다, 주여. 저희가 마셨습니다, 주여. 피와 그 피 속에 잠겨 있는 형상을, 주여. 기도하소서, 주여. 저희가 가까이 있나이다. * 흑암 : '어둠' 외에도 '죽음의 밤'이라는 뜻도 있는데, 특히 예수가 십..

오드리 로드(Audrey Geraldine Lorde)

여성이 말한다(A Woman Speaks) 해의 흔적과 손길을 받은 달 내 마술은 쓰이지 않았으니 바다는 되돌아올 때 내 형체를 뒤에 남겨 두겠지. 나는 호의가 필요 없다 혈연에 연연하지 않고 사랑의 저주만큼 가차 없으며 내가 저지른 실수만큼 또는 자만만큼 영원하기를 나는 혼동하지 않는다 사랑을 동정과 증오를 경멸과 만약 나를 알고 싶다면 끊임없이 바다가 철썩거리는 천왕성의 내장을 들여다보길. 나는 출생에도 신성에도 깃들지 않으며 늙지 않고 반쯤 자라 여전히 찾고 있다 내 자매들을 다호메이*의 마녀들은 우리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둘둘 감은 옷 안에 나를 입고 애도한다. 나는 여성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내 미소를 조심하라 나는 오래된 마법과 정오의 새로운 분노 당신에게 약속된 드넓은 미래를 품은 위험한 ..

파울 첼란(Paul Celan)

죽음의 푸가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점심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쓴다 그는 쓴다 어두워지면 독일로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그는 그걸 쓰고는 집 밖으로 나오고 별들이 번득인다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사냥개들을 불러낸다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유대인들을 불러낸다 땅에 무덤 하나를 파게 한다 그가 우리들에게 명령한다 이제 무도곡을 연주하라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마신다 밤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아침에 또 점심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쓴다 그..

앙리 미쇼(Henri Michaux)

서울에서 서구 문명은, 물론, 온갖 결점을 다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모든 문명을 쓸어가는 자력(磁力)을 갖고 있다. 세계에는 얕은 즐거움, 흔들림을 향한 일방적인 충동이 있다. 일본의 옛 음악은 바람의 신음 소리와 같다. 새것은 이미 명랑해지고 있다. 중국의 옛 음악은 순수한 경이이다. 가슴에 순하고 느리다. 새것은 다른 것과 같다. 한국의 옛 음악은 비극적이고 무시무시하지만 그것을 부른 것은 기생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나, 즐겁게 춤을 춥시다’ (그들의 현재의 음악은 망할 놈의 빠른 곡이며, 황인종 중에서도 한국인의 특색을 이루는 그 특이한 격정을 보여준다). 사람은 이제 세계의 먹이가 아니지만, 세계는 사람의 먹이이다. 사람은 오랜 침체에서 빠져나온다. 전에는 정말 울적해 있었나 보다..

오드리 로드(Audrey Geraldine Lorde)

블랙 유니콘(The Black Unicorn) 블랙 유니콘은 탐욕스럽다. 블랙 유니콘은 성마르다. 블랙 유니콘은 오인되었다. 그림자로 또는 상징으로 차디찬 땅을 헤치며 끌려 다녔다. 내 분노를 향한 조롱이 안개처럼 흩뿌려진 곳을, 유니콘의 뿔이 놓이는 건 그녀의 무릎 위가 아니라 커져 가는 달 구덩이 깊숙한 곳이다. 블랙 유니콘은 가만있지 못한다 블랙 유니콘은 수그릴 줄 모른다 블랙 유니콘은 자유롭지 않다. * * * * * * * * * * * * * * * * 오드리 로드(Audrey Geraldine Lorde, 1934년 2월 18일 ~ 1992년 11월 17일)은 미국의 작가, 교수, 철학자, 교차 페미니스트, 시인 및 시민권 운동가였다. 그녀는 자칭 "흑인,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사회주의자,..

앙리 미쇼(Henri Michaux)

빙산 난간도 울타리도 없는 빙산(冰山)에, 지친 늙은 까마귀들과 요사이 죽은 수부들의 망령들이 북극의 마(魔)와 같은 밤에 와서 팔꿈치를 괸다. 빙산, 빙산, 영원한 겨울의 무종교(無宗敎)의 대성당(大聖堂), 유성(流星) 지구의 머리 위에 씌운 빙모(氷帽) 추위에서 태어난 너의 기슭은 얼마나 고귀하고 또 순결한가. 빙산, 빙산, 북대서양의 등,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바다 위에 얼어붙은 장엄한 불상(佛像), 출구(出口) 없는 죽음의 번쩍거리는 등대, 침묵의 절규는 수세기 동안 계속된다. 빙산, 빙산, 필요 없는 고독인, 갇히고 멀고 벌레 없는 나라, 섬들의 가족, 샘물의 가족인 그대들은 보면 볼수록 얼마나 나에게는 친숙한 것이냐--- * * * * * * * * * * * * * * * * 앙리 미쇼(He..

오스트리아:프란츠 제라피쿠스 그릴파르처(Franz Seraphicus Grillparzer)

키스 손 위에 하는 것은 존경의 키스, 이마 위에 하는 것은 우정의 키스, 뺨 위에 하는 것은 감사의 키스, 입술 위에 하는 것은 사랑의 키스; 내리감은 눈 위에 라면 기쁨의 키스, 손바닥 위에 라면 간구의 키스, 팔과 목에 하는 것은 욕망의 키스, 그밖에 하는 것은 모두 미친 짓. * * * * * * * * * * * * * * * * 프란츠 제라피쿠스 그릴파르처(Franz Seraphicus Grillparzer, 1791년 1월 15일 ~ 1872년 1월 21일)는 오스트리아의 작가, 시인, 극작가, 정치인이다. 괴테, 실러의 고전주의에 영향을 받은 오스트리아 최초의 고전적인 극작가로서, 19세기 초엽의 낭만주의 연극으로부터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빈에서는 1808년 이후 낭만주의의 거성 슐레겔이..

인도:카비르 다스(Kabir Das)

꽃 하나가 피면 나는 황홀한 피리소리를 알지만 누구의 피리소린지는 모른다. 램프는 심지도 기름도 없이 타오른다. 연꽃은 뿌리도 없이 피어난다! 꽃 하나가 피면, 모든 꽃들이 따라 핀다. 달맞이꽃이 달님만 바라보듯 천둥새가 비를 기다리듯 우리가 평생을 바쳐 사랑할 이는 누구인가? * * * * * * * * * * * * * * * * 카비르 다스(Kabir Das, 1398년 ~ 1518년, 또는 1440년 ~ 1518년)는 인도의 철학자, 성자, 시인이다. 카비르는 델리 술탄국 말엽 바라나시 출신의 힌두 사상가 겸 시인으로, 1398년 ~ 1518년까지 무려 120세까지 살았다. 카비르는 원래 비나레스 브라만 계급의 한 과부의 아들이었으나, 길거리에 버려진 것을 이슬람교도의 방직공 부부가 양육하였다고 ..

앙리 미쇼(Henri Michaux)

노 젓다 네 이마를 네 배를 네 삶을 나는 저주했다 네가 걸어 다닌 거리를 네가 만진 것들을 나는 저주했다 나는 저주했다 네 꿈의 내부를 네 눈에 웅덩이를 파 못 보게 하고 네 귀에는 곤충을 넣어 못 듣게 하고 네 뇌에는 스펀지를 넣어 이해 못 하게 했다 나는 네 육체의 넋을 죽였으며 네 깊은 삶을 동결시켰다 네가 숨 쉬는 공기는 너를 숨 막히게 하고 네가 숨 쉬는 공기는 굴 속의 공기 같다 벌써 내쉰 공기 하이에나가 버린 공기다 이 썩은 공기를 아무도 숨 쉴 수 없다 네 육체는 축축하고 네 살갗은 공포에 질려 땀을 흘린다 네 겨드랑이에서는 멀리서도 묘지냄새가 난다 동물들이 네 길목에 서있다 밤마다 개들은 네 집 쪽을 향해 으르렁거린다 너는 도망갈 수 없다 꼼짝달싹할 수 없다 피곤해서 네 몸은 납덩이같다..

앙리 미쇼(Henri Michaux)

바다와 사막을 지나(A travers Mers et Desert) 효력 있다 숫처녀와 씹하듯 효력 있다 효력 있다 사막에 물이 없듯 효력 있다 내 행동은 효력 있다 효력 있다 죽일 준비가 되어 있는 부하들에게 둘러싸여 따로 서 있는 배반자처럼 효력 있다 물건을 감추는 밤처럼 효력 있다 새끼를 낳는 염소처럼 조그맣고 조그맣고 벌써 비탄에 잠긴 새끼들 효력 있다 독사처럼 효력 있다 상처를 낸 단도처럼 그걸 보존하기 위한 녹과 오줌처럼 강하게 하기 위한 충격, 추락, 동요처럼 효력 있다 내 행동은 효력 있다 결코 마르지 않는 증오의 대양을 가슴에 심어주기 위한 모멸의 웃음처럼 효력 있다 몸을 말리고 넋을 굳히는 사막처럼 효력 있다 내팽개쳐 논 시체를 뜯어먹는 하이에나의 턱처럼 효력 있다 효력 있다 내 행동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