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시/러시아 23

알렉산드르 블로크(Aleksandr Aleksandrovich Blok)

대지 위의 모든 것은 대지 위의 모든 것은 죽어가리라 ㅡ 어머니도, 젊음도, 아내는 변하고, 친구는 떠나가리라. 그러나 그대는 다른 달콤함을 배워라, 차가운 북극을 응시하면서. 그대의 돛배를 가져와, 멀리 떨어진 북극을 향해하라, 얼음으로 된 벽들 속에서 ㅡ 그리고 조용히 잊어라, 그곳에서, 사랑하고 파멸하고 싸웠던 일들...... 정열로 가득 찼던 옛 고향땅을 잊어라. 그리고 지쳐버린 영혼을 더딘 추위의 떨림에 길들게 하라, 그곳으로부터 빛이 들이닥칠 때, 여기서 영혼은 아무것도 필요치 않도록. ​ * * * * * * * * * * * * * * * 알렉산드르 블로크(Aleksandr Aleksandrovich Blok.1880.11.28∼1921.8.7)는 러시아 시인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출생했..

알렉산드르 블로크(Aleksandr Aleksandrovich Blok)

눈멀고 어리석은 내게도 눈멀고 어리석은 내게도 시간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흘러갔다 오늘이 되어서야 나는 꿈에서 보았다 그녀는 나를 한 번도 사랑한 적 없음을...... 나는 그저 우연히 만난 사람이었음을, 나는 그저 오다가다 스친 사람이었음을, 하지만 그 어린 말의 열기는 식어 버렸고 그녀는 내게 용서하라 말했다 하지만 내 마음은 이전의 그 사랑으로 가득 차 타인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아무런 느낌도 주지 않고, 그 마음, 그리고 하나뿐인 그 노래는 오늘도 내 꿈속에서 울려 퍼졌다 ​ * * * * * * * * * * * * * * * 알렉산드르 블로크(Александр Блок, 1880년 11월 16일 ~ 1921년 8월 7일)는 러시아의 시인이다. 알렉산드르 블로크는 1880년 11월 16일 상트페테..

보리스 레오니도비치 파스테르나크(Бори́с Леони́дович Пастерна́к)

유명해진다 함은 유명해진다 함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내세울 만한 것도 아니다 고문서를 가져갈 필요도 없고, 원고에 마음 쓸 필요도 없다. 창작의 목적은 자기 몰두지, 큰 소동도 성공도 아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사람들의 입에 소문 나는 일은 수치. 그러나 사칭하지 말며 살아야 하고, 공간의 사랑에 몰입하여, 미래의 부름에 귀 기울이기 위해, 끝내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리고 종이가 아니라 운명에 여백을 남겨야 한다, 완전한 삶이라는 장소와 장들을 책의 여백에 선 그어 놓으면서. 무명에 잠기거나, 무명에 자기 발걸음을 숨겨야 한다. 지형이 안갯속에 숨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남들이 걷던 삶의 흔적을 따라 한 걸음씩 너의 길을 걸어가되, 너 자신은 승리와 패배를 가리지 말아야 한다. 외로운 운명..

보리스 레오니도비치 파스테르나크(Бори́с Леони́дович Пастерна́к)

나는 모든 일에서 나는 모든 일에서 본질에 이르고 싶다. 일에서나, 탐구의 길에서나, 마음의 갈등에서나. 지난날들의 본질에까지. 그것들의 원인에까지, 근원과 뿌리에까지, 중심에까지. 언제나 운명과 사건의 실을 이어 잡으며, 살며, 생각하며, 느끼며, 사랑하며, 열어 놓고 싶다. 아, 가능하다면, 일부라도, 나는 정열의 본질에 대한 8 행시를 쓰고 싶다. 불법과 원죄에 관해서, 도망과 추격에 관해서, 당황한 불의에 관해서, 팔꿈치와 손바닥에 관해서. 그것의 법칙을 찾고, 그것의 시초를 찾고, 그리고 그 이름의 첫 글자를, 반복하리라. 나는 꽃밭처럼 시를 심으리라. 잎에 난 결의 모든 떨림으로, 그 속에서 보리수가 차례로 한 줄로 목덜미로 꽃을 피우리라. 나는 시 속에 장미 향기와 박하 향기를 들이리라. 초..

보리스 레오니도비치 파스테르나크(Бори́с Леони́дович Пастерна́к)

겨울밤 눈보라가 휘몰아쳤지. 세상 끝에서 끝까지 휩쓸었지. 식탁 위엔 촛불이 타고 있었네. 촛불이 타고 있었네. 여름날 날벌레 떼가 날개 치며 불꽃으로 달려들듯 밖에서는 눈송이들이 창을 두드리며 날아들고 있었네. 눈보라는 유리창 위에 둥근 원과 화살들을 만들었고 식탁 위엔 촛불이 타고 있었네. 촛불이 타고 있었네. 촛불 비친 천장에는 일그러진 그림자들 엇갈린 팔과 엇갈린 다리처럼 운명이 얽혔네. 그리고 장화 두 짝 바닥에 투둑 떨어지고 촛농이 눈물 되어 촛대서 옷 위로 방울져 떨어졌네. 그리고 모든 것은 눈안개 속에 희뿌옇게 사라져 갔고 식탁 위엔 촛불이 타고 있었네. 촛불이 타고 있었네. 틈새로 들어온 바람에 촛불 날리고 유혹의 불꽃은 천사처럼 두 날개를 추켜올렸지. 십자가 형상으로. 눈보라는 2월 내..

예브게니 알렉산드로비치 옙투셴코(Евге́н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Евтуше́нко)

나는 위조지폐라도 찍어낼 테다 어린아이인 나에게서 순진함을 털어 내버리며, 그들은 내 당근수프 위에 바퀴벌레와 함께 지혜를 뿌려 놓았다. 덧대어 기운 내 셔츠 그 봉합선 속에 꿰매어진 벼룩들이 작은 소리로 지혜를 속삭여 주었다. 그러나 가난이 지혜는 아니며 돈 또한 지혜는 아니다. 그들이 텅 빈 내 위장을 강타한 뒤로 나는 발작적으로 움직이며, 조금씩, 어쭙잖게 성인이 되어 갔다. 나는 나이프들의 과장된 은어를 사용했다. 나는 누군가가 내버린 담배꽁초에서 싸늘한 타액의 연기를 피워 마셨다. 나는 내장을 통해 전쟁의 굶주림을 터득했다. 내 늑골들이 나에게 러시아의 지형을 가르쳐 주었다. 흔히 말하는 명성을, 아무도 나에게 주질 않았다. 병아리 목 잡아채듯 나 혼자서 그렇게 움켜잡았다. 전시의 기차역처럼 비..

예브게니 알렉산드로비치 옙투셴코(Евге́н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Евтуше́нко)

거짓말 아이들에게 거짓을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네 허위를 진실인 양 말하는 것도 잘못이지 아이들에게 천국에 하느님이 계시고 이 세상이 잘 굴러간다고 말하는 것도 잘못이야 아이들은 자네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안다네, 아이들도 인간이거든 아이들에게 숱한 어려움에 대해 말해주게 앞으로 일어날 일만이 아니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도 분명히 보게 해줘야 하네 살면서 맞닥뜨리게 될 장애와 난관에 대해 말해주게 마주치게 될 슬픔과 고통에 대해 말해주게 지옥 같은 일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도 알려주게 행복의 대가를 아는 자만이 행복할 수 있지 않은가 잘못을 알면서도 용서해서는 안 되네 그냥 두면 반복되고 늘어나 나중에 우리 학생들은 우리가 용서했다는 것을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 * * * * * * * * * * *..

예브게니 알렉산드로비치 옙투셴코(Евге́н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Евтуше́нко)

별의 역사 이 세상에 흥미롭지 않은 사람은 없다 사람의 운명은 별의 역사와도 같은 것 하나하나가 모두 독특하고 비범하여 서로 닮은 별은 하나도 없다 누군가가 눈에 띄지 않게 살았다면 눈에 띄지 않는 것에 친숙해졌다면 바로 이 눈에 띄지 않는 것으로 하여 그는 사람들 가운데 흥미롭다 모든 사람에게 그만의 비밀스러운 세계가 있다 이 세계 안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있다 이 세계 안의 가장 무서운 순간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사람이 죽어 가면 그와 함께 그의 첫눈이, 첫 키스가, 첫 번째 싸움이 죽어 가는 것 … 이 모든 것을 그는 함께 가져간다 그래, 책들이, 다리들이, 자동차들이, 화가의 화폭들이 남을 것이다 그래, 많은 것은 남게 되어 있다 하지만 그래도 무언가 여전히 떠나가는 ..

예브게니 알렉산드로비치 옙투셴코(Евге́н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Евтуше́нко)

바비 야르(Babi Yar) 바비 야르 위에는 아무런 기념비가 없다. 가파른 협곡은 마치 황폐한 묘비 같다. 나는 오늘 이스라엘 민족과 같은 나이를 먹었다고 느끼며 두려워한다. 나는 이제 내가 유태인이라고 느낀다. 여기서 나는 고대 이집트를 떠돈다. 그리고 여기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며, 아직도 나는 못자국이 나있다. 나는 내가 드라이푸스라는 느낌이 든다. 부르주아 무리들이 나를 고발하고 재판한다. 나는 철창 속에 있다. 나는 둘러 싸여서 학대받고, 침세례를 받고, 비방받고, 레이스 장식을 한 멋진 여인들이 내 얼굴에 양산을 들이대고 괴성을 지른다. 나는 내가 비엘로스톡의 작은 아이로 느껴진다. 바닥에는 피가 튀어 있다. 선술집의 주모자는 짐승같이 되어간다. 그들에게서 보드카와 양파 냄새가 풍긴다. 나는 ..

오시프 에밀리예비치 만델슈탐(Осип Эмильевич Мандельштам)

침묵 아직 태어나지 않았으나, 그녀는 음악이요 말이다. 그래서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깨뜨릴 수 없는 관계. 바다의 가슴은 조용히 숨을 쉬나 낮은 광인처럼 빛난다. 흐린 하늘색 그릇의 거품이 창백한 라일락 같다. 태어날 때부터 순결한 크리스털 음성처럼, 내 입술이 태초의 침묵을 얻게 해 주오! 아프로디테여, 거품으로 남아 있으라 그리고 말이 음악으로 돌아가게 하라 가슴이여, 마음의 수치를 담아라 삶의 근원에서 합쳐진 채로! * * * * * * * * * * * * * * * * 오시프 에밀리예비치 만델슈탐의 시집 에는 1930년대에 쓰인 그의 시가 어떻게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었는지를 소개하는 대목이 나온다. 스탈린을 풍자하는 시를 썼다는 이유로 비밀경찰에 원고를 압수당하고 시들이 전부 불태워졌음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