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현대시 감상 221

221. 그나저나

221. 그나저나                       고증식(1959.2.5 ~ ) 불쑥 전화 온 어릴 적 고향 친구애들은 뭐 하냐 묻길래그냥 뭐 알바 비슷한 거 한다니까요즘 애들 참 다들 왜 그러냐고우리 애는 유학 가서 자리 잡았다고그나저나선생은 언제까지 할 참이냐 묻길래올까지만 하고 명퇴할까 한다니까뭐 한다고 나오냐고 평교사 아니냐고아무리 그래도 교장은 하고 나와야지그냥 교사를 누가 알아주냐고니 마누라도 그냥 선생 아니냐 물으니넌 남자 아니냐고 여자랑 같냐고그나저나요즘도 시는 쓰냐 묻길래안 그래도 엊그제 시집이 나왔는데주소나 좀 불러주라 했더니됐다고, 너도 다 생각 있어 내겠지만요새도 시집 읽는 사람 있긴 있냐고그나저나시집 내면 돈은 좀 되냐고그 동네서 알아주긴 좀 알아주냐고 그나저나 바빠서 그럼..

62. 바라춤

62. 바라춤                                          신석초(申石艸, 1909.6.4~1976.3.8)  언제나 내 더럽히지 않을 無垢(무구)한 꽃잎으로 살어 여러 했건만 내 가슴의 그윽한 수풀 속에 남몰래 솟아오르는 구슬픈 샘물을 어찌할까나!  靑山(청산) 깊은 절에 울어 끊인 鐘(종)소래는 하마 이슷도 하여이다 耿耿(경경)히 밝은 달은 덧없이 빈 寺院(사원)을 비초이고 後園(후원) 이슥한 꽃가지에 잠못이루는 杜鵑(두견)조차 피피 슬피 우는다  아아 어이하리! 내 홀로 다만 내 홀로 지닐 즐거운 無常(무상)한 열반을 꿈꾸었으라 그러나 나도 모르게 어지러운 티끌이 내 마음의 맑은 거울을 흐리노라  몸은 슬퍼라 허물 많은 사바의 몸이여! 現世(현세)의 어지러운 번뇌가 짐승..

56. 曠野(광야)

56. 曠野(광야)                                       이육사(李陸史, 1904.4.4~1944.1.16)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光陰(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千古(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超人(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1946 󰡔육사시집󰡕 * 이 시는 이육사의 확고한 역사 의식에 바탕을 둔 현실 극복의 의지가 예술 의식과 탁월하게 조화를 이룬 이육사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특..

54. 絶頂(절정)

54. 絶頂(절정)                                              이육사(李陸史, 1904.4.4~1944.1.16)  매운 계절의 채쭉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우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1940. 문장  * 이 시는『문장』(1930)에 발표된 시이다. ‘의열단’의 일원으로 치열한 독립 운동을 벌였던 이육사의 자세가 잘 나타나 있는 시이다. ‘고원, 북방’은 모두 ‘매운 계절의 채찍’, 즉 일제에 의해 밀려온 공간이면서 동시에 그것에 저항하는 공간인데, 이육사는 이 공간을 단 한번의 실수에도 목숨을 잃을 ..

53. 靑葡萄(청포도)

53. 靑葡萄(청포도)                                                   이육사(李陸史, 1904.4.4~1944.1.16)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靑袍(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수건을 마련해 두렴.  1939. 문장  * 이 시에는 이육사의 시가 흔히 표현한 복잡한 갈등 의식이나 대결의 의지가 드러나지 않는다. 제재인 청포도를 비롯한 여러 소재들에 의..

220. 영산강

영산강 1 푸른 바람에 굽이치는 물살을 보아라 보아라 백사장 세월의 무늬 사금파리 얼굴도 기웃거린다 토라지는 입술이 곱지 않으냐 2 영산강 상류에 가서 우리 엄니 빨랫터에 앉아 보아라 물 속에는 송사리 떼 몰려가고 그 사이사이 미소 띈 우리 엄니가 세상살이 그을은 귀신 같은 네 얼굴을 맞이하더라 3 영산강 상류에 가 보아라 천년에 한 번 백마 타고 오시는 님 님의 모습 가 보아라 천년에 한 번 백마 타고 오시는 님 4 일몰의 영산강 강가에 서 보아라 천년에 한 번 울먹이는 소리 들어 보아라 천년에 한 번 울먹이는 역사 들어 보아라 5 아배의 말씀은 두만강에 서성이고 엄니의 말씀은 영산강에 떠돌고 노기 띤 아배의 말씀은 문 밖에서 서성이고 오늘도 슬프게 영산강은 흐르더라 * * * * * * * * * *..

219. 비 개인 여름 아침

219. 비 개인 여름 아침 김광섭(金珖燮) 비가 개인 날, 맑은 하늘이 못 속에 내려와서 여름 아침을 이루었으니 녹음(綠陰)이 종이가 되어 금붕어가 시를 쓴다. ---시집 「동경(憧憬)」(1938)--- 1.시작(詩作) 배경 5행밖에 안 되는 짧은 시지만, 산뜻한 여름 감각이 유감없이 표현되어 담담한 한 폭의 수채화를 대하는 느낌이다. 비가 개인 날의 유난히 맑은 하늘, 녹음은 짙어 새로이 윤기가 흐른다. 물속을 들여다 보니 맑은 하늘이 내려와 잠겨 있고, 짙푸른 녹음이 그림처럼 곱게 배경을 이루고 있다. 금붕어도 신이 나서 멋지게 헤엄치며 놀고 있다. 그것을 지은이는 무슨 색지를 펴놓고 금붕어가 시를 쓴다고 표현했다. 아름다운 것은 역시 시의 최대의 매력이요, 기쁨이다. 이 시를 읽으면 시적인 매력과..

218. 마 음

218. 마음 김광섭(金珖燮)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가도 그림자 지는 곳. 돌을 던지는 사람, 고기를 낚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이리하여 이 물가 외로운 밤이면, 별은 고요히 물 위에 뜨고 숲은 말없이 물결을 재우느니. 행여, 백조가 오는 날, 이 물가 어지러울까 나는 밤마다 꿈을 덮노라. --- 「문장」 6월호(1939) --- 1.시작(詩作) 배경 이 시는 곱고 부드러운 격조와 적절한 은유로 아름다운 언어의 조화를 이룬다. 은유와 상징이 잘 구사되어 세련미와 함께 지적 관조도 보인다. 자기의 마음을 고요한 물결에 비유하여, 심리적 갈등과 함께 파문을 일으키기 쉬운 마음을 지키려는 경건한 자세를 잘 드러내고 있다. 초기 작품에 속하는 이 시는 자기의 꿈을 ..

217. 해바라기

217. 해바라기 김광섭(金珖燮) 바람결보다 더 부드러운 은빛 날리는 가을 하늘 현란한 광채가 흘러 양양(洋洋)한 대기에 바다의 무늬가 인다. 한 마음에 담을 수 없는 천지의 감동 속에 찬연히 피어난 백일(白日)의 환상을 따라 달음치는 하루의 분방한 정념에 헌신된 모습 생의 근원을 향한 아폴로의 호탕한 눈동자같이 황색 꽃잎 금빛 가루로 겹겹이 단장한 아! 의욕의 씨 원광(圓光)에 묻힌 듯 향기에 익어 가니 한 줄기로 지향한 높다란 꼭대기의 환희에서 순간마다 이룩하는 태양의 축복을 받는 자 늠름한 잎사귀들 경이(驚異)를 담아 들고 찬양한다. ---시집 「해바라기」(1957)--- 1.시작(詩作) 배경 해바라기가 피어나는 자연의 배경 속에서 자연의 아름다운 현상과 함께 어우러져 생명에 대한 강한 의욕을 느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