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현대시 감상

53. 靑葡萄(청포도)

높은바위 2024. 6. 2. 09:58

53. 靑葡萄(청포도)

 

                                                  이육사(李陸史, 1904.4.4~1944.1.16)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靑袍(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수건을 마련해 두렴.

 

1939. 문장

 

* 이 시에는 이육사의 시가 흔히 표현한 복잡한 갈등 의식이나 대결의 의지가 드러나지 않는다.

제재인 청포도를 비롯한 여러 소재들에 의해 고향의 이미지를 티없이 맑은 세계로 승화시킨 다음, 이런 공간에서 같이 지낼 님()을 그리워하는 정서를 읊었다.

여기서 그리움의 대상으로 설정되어 있는 는 인물일 뿐만 아니라, 바로 그런 인물로 대표되는 세계라 하겠다.

결국 이 시는 고향에 대한 상실감을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언젠가는 회복되리라는 기대감을 지닌 시적 자아를 보여 주어 건강한 정서로 귀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어휘 선택에 있어서 이 시는 시각 심상이 주도하고 있다.

청포도, 하늘, 푸른 바다, 흰 돛, 청포, 모시 수건등은 이런 특징을 지닌 예이다. 또 이들 시어는 고향을 청순한 이미지로 형상화 하면서, 상징적 의미도 지니고 있다.

청포도가 전통적이며 과거와 관계되는 세계를 표상한다면, ‘흰 돛, 모시 수건으로 드러나는 흰색의 이미지는 미래와 관련을 맺도록 설정되어 있다.

이 시의 율격은 두드러진 외형율이 눈에 띄지 않으나 차분하게 그리움을 읊어 나가기 위해 4음보와 유사한 율격을 많이 구사하였고, 부분적으로 3음보격도 활용하였다.

이러한 감상은 이육사의 전기적 사실과 관련을 매지 않고 대체적으로 객관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와는 달리 육사가 지사적 정신으로 독립을 위한 행동을 했던 사실과 관련하여 이 시를 조국 광복에 대한 염원을 읊은 거승로 해석하는 역사주의적 관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