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曠野(광야)
이육사(李陸史, 1904.4.4~1944.1.16)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光陰(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千古(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超人(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1946 육사시집
* 이 시는 이육사의 확고한 역사 의식에 바탕을 둔 현실 극복의 의지가 예술 의식과 탁월하게 조화를 이룬 이육사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특히 이 시에 드러난 자기 극복의 치열성에 바탕을 둔 초인 정신, 투철한 현실 인식에서부터 출발하는 지사 의식, 순환의 역사관에 뿌리를 둔 미래 지향의 역사 의식 등은 이육사 시의 면모를 종합적으로 제시해 주는 것이다.
이 시는 시간의 추이에 따라 구성되어 있다. 제 1-3연까지는 과거, 제 4연은 현재, 제 5연은 미래로 설정되어 있다. 한편, 이 시는 내용상 기승전결의 4단 구성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전통적인 漢詩(한시) 작법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1,2연에서는 광야의 모습을 형상화 했다. 1연에서는 천지가 개벽하는 태초의 상황을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라는 부정적 설의법을 수반하여 형상화함으로써 우리의 민족사가 출발된 광야의 원시성, 신성성을 제시했다. 2연에서는 활유법을 구사하려 광야의 광활하고 장엄한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특히 이 부분에서는 ‘모든’, ‘휘’, ‘차마’ 등이 ‘범하던 못하였으리라’와 긴밀한 호응을 이루면서 광대 무변한 광야의 웅장함과 신성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3연에서는 ‘광음’, ‘계절’, ‘강물’ 등의 시간적 이미지들을 통하여 민족사의 태동을 형상화했다. 특히, 이 부분에서는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에서 시간적 개념인 ‘계절’을 시각적 이미지로 제시하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에서 동적 이미지를 제시하여 신성한 공간인 광야에서 태동한 우리 민족사의 유구한 흐름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햇다.
4연에서는 현실적 상황과 그에 대한 서정적 자아의 대응 자세를 제시했다. 지금은 ‘눈’이 내리고 있는 겨울이다. 겨울의 혹독한 추위로 인해 ‘매화 향기’는 아득하게 멀기만 하다. 일제 말기의 압제는 눈이 내리고 겨울처럼 너무도 혹독하여 광복의 기운은 멀고도 아득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시적 자아는 그러한 현실적 상황에 굴하지 않고,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라는 의지를 보인다. 씨를 뿌리는 자는 그 씨에서 싹이 나고 그것이 자라 꽅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즉 씨를 뿌리는 행위는 밝은 미래에 대한 신념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이것은 확고한 역사 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현실적 상황이 아무리 가호가고 절망적이라 하더라도 밝은 미래가 반드시 올 것이므로 결토 현실에 굴복할 수 없다는 강인한 현실 극복 의지가 ‘씨’에 함축되어 있는 자기 희생적 이미지와 결합되어 강하게 부각되어 있다.
5연에서는 미래 지향의 확고한 역사 의식을 제시했다. 암담한 현실적 상황에서 내가 뿌린 ‘가난한 노래의 씨’를 수확하여 ‘목놓아’ 노래할 ‘백마타고 오는 초인’은 과거의 모든 질곡과 현재의 고통과 억압에서 벗어나 찬란한 민족사를 꽃 피울 인물이다. 그런데 그것은 막연한 추측이나 기대가 아니라 확신이요, 단정이다.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에서의 ‘있어’는 확고한 단정을 의미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