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바라춤
신석초(申石艸, 1909.6.4~1976.3.8)
언제나 내 더럽히지 않을
無垢(무구)한 꽃잎으로 살어 여러 했건만
내 가슴의 그윽한 수풀 속에
남몰래 솟아오르는 구슬픈
샘물을 어찌할까나!
靑山(청산) 깊은 절에 울어 끊인
鐘(종)소래는 하마 이슷도 하여이다
耿耿(경경)히 밝은 달은 덧없이
빈 寺院(사원)을 비초이고
後園(후원) 이슥한 꽃가지에
잠못이루는 杜鵑(두견)조차
피피 슬피 우는다
아아 어이하리! 내 홀로
다만 내 홀로 지닐 즐거운
無常(무상)한 열반을 꿈꾸었으라
그러나 나도 모르게 어지러운 티끌이
내 마음의 맑은 거울을 흐리노라
몸은 슬퍼라 허물 많은
사바의 몸이여!
現世(현세)의 어지러운 번뇌가
짐승처럼 내 몸을 물고
오오 형제 이 아리따움과
내 寶石(보석) 숲풀 속에 비밀한
뱀의 꿈어리는
形役(형역)의 끝없는 지름길이여
구름으로 잔잔히 흐르는 시내물 소래
지는 꽃잎도 띄워 둥둥 떠내려 가것다
부서지는 珠玉(주옥)의 여울이여!
너울너울 흘러서 滄海(창해)에
미치기 전에야 그칠 줄이 있으리
저절로 흘러가는 널조차 부러워라.
1955. 현대문학
* 본명 응식(應植). 충청남도 서천(舒川)에서 출생하였다. 초등학교 졸업 후 한학을 배우다가 1926년 상경, 제1고보에 입학했으나 중퇴하고, 1931년 일본에 건너가서 호세이[法政]대학에서 철학을 수학하였다.
1935년경부터 이육사(李陸史)를 알게 되어 그를 통해 시 《호접(胡蝶)》 《비취단장(翡翠斷章)》 《바라춤 서사(序詞)》 《뱀》 《검무랑(劒舞娘)》 《파초》 등을 발표했으나 일제강점기 말에는 고향에 묻혀 침묵하였다. 8·15광복 후 상경하여 광복 전의 작품들을 모아 《석초시집》을 간행하였다.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어 1967년 예술원상을 수상하였고 《한국일보》 논설위원으로 오래 근무하였다. 시집으로 《바라춤》 《폭풍의 노래》 《처용은 말한다》 등이 있다.
신석초는 1930년대 초반 카프에 가담하여 신유인(申唯仁)이란 이름으로 평론 활동을 한 바 있다. 그는 카프의 맹원으로서 당시 카프의 정치 편중주의의 노선을 비판하는, [문학 창작의 고정화(固定化)에 항(抗)하여]라는 평론을 발표하여 창작방법론의 불씨를 제공하고는, 전향하여 동인지 {자오선}을 발간하면서 시인으로 등단한다.
그의 시 세계는 카프의 정치성과는 전혀 다른 정신 세계를 보여 준다. 그는 프랑스 상징주의, 발레리의 순수시 운동과 이백(李白), 두보(杜甫), 나아가 노장사상의 영향을 받은 제1시집 {석초 시집}의 허무주의적 세계관으로부터 제2시집 {신석초 시선}에 이르러 새로운 시적 질서를 획득하게 된다. 그 계기가 되는 작품의 장시 <바라춤>이다.
이 시 제목인 ‘바라춤’은 불전에 재를 올릴 때, 추는 춤으로 일종의 승무이다. 이 시는 불교 사상뿐만 아니라, 노장사상도 그 배경을 이루고 있다. 꽃의 자유로움을 부러워하는 서정적 자아의 심정은 인간이 자연과 일체를 이룸으로써 최고의 선에 도달한다는 무위자연의 도가 사상과 동일하며, 특히 이 시가 불교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은 서정적 자아가 세속적인 번뇌로 갈등하는 모습을 불교적 언어를 통해 표현하고 있는 점으로도 알 수 있다.
이 시는 바라춤이라는 제재를 통하여 세속의 인연, 욕망, 번뇌와 그것을 끊고자 하는 종교적 구도 사이의 갈등을 그린 작품이다. 조지훈의 ‘승무’와 제재 및 갈등 구조가 비슷한데, 이 작품에서는 춤의 동작에 대한 묘사가 없고 갈등의 양상은 좀더 강렬하게 나타난다.
제1연의 ‘티없는 꽃잎’이란 작중 인물이 추구하는 맑고 아름다운 삶의 이미지이다. 일체의 세속에 물들지 않은 청정한 정신의 경지라 할 수 있다. ‘구슬픈 샘물’은 이와 대립적 관계에 있는 세속적 번뇌에 해당한다. 이 둘 사이의 갈등 속에서 괴로워하는 ‘나’의 모습이 제2연에서 ‘잠 못 이루는 두견’에 투영되어 그려진다.
제3연과 4연은 이러한 갈등의 양상을 좀 더 확대된 모습으로 보여준다. ‘나’는 ‘무상한 열반’ 즉 드높은 초월의 경지를 꿈꾸지만, 떨쳐버리지 못한 번뇌가 어지러운 티끌이 되어 마음의 고요함을 깨뜨린다. 그 근원적 이유는 그가 생명을 지닌 존재로서의 육체의 욕망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때문이다. 제4연의 ‘뱀이 꿈어리는 형역’이 바로 그것이다. 형역이란 육신(의 욕망)에 의한 정신의 예속을 뜻하는 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작품이 ‘열반, 사바, 번뇌’ 같은 용어의 구사에서 불교적일 뿐만 아니라, 주제상으로도 ‘욕망-초월, 육신-영혼, 번뇌-해탈’이라는 대립 구도를 통한 불교적 관심을 주축으로 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한다.
전체적으로 이 시의 갈등은 열반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는 시적 자아의 아픈 현실을 ‘구슬픈 샘물’, ‘잠 못 이루는 두견’, ‘짐승처럼 내 몸을 물고’ 등에서 잘 드러난다. 이것은 열반의 세계를 상징하는 ‘창해’로 흘러가는 꽃잎을 부러워하는 시적 자아의 심정과 대조를 이루며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갈등을 보여 준다.
신석초의 시세계 : 그는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카프에 가담했으나 카프의 도식주의적 경향에 실망하여 박영희의 전향 선언과 때를 같이하여 탈퇴하였다. 1935년경부터 이육사를 알게 되어 그를 통해 시 「호접」,「비취단장」,「바라춤서사」,「뱀」, 「검무랑」,「파초」등을 발표하였으나, 그의 시는 고답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을 특색으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