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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에 관한 글

소망에 관한 글 나에게는 소망이 한 가지 있습니다. 나의 한 가지 소망은내 마음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는 것입니다.높아지기보다는 낮아질 때 마음이 따뜻해지기 때문입니다.나는 날마다 마음이 낮아지는 노력을 할 것입니다. 나에게는 소망이 한 가지 있습니다. 나의 한 가지 소망은내 생각이 복잡해지는 것이 아니라 단순해지는 것입니다.생각이 복잡할 때보다 단순해질 때 마음이 깊어지기 때문입니다.나는 날마다 생각이 단순해지는 노력을 할 것입니다. 나에게는 소망이 한 가지 있습니다. 나의 한 가지 소망은내 마음이 부유해지기보다는 가난해지는 것입니다.마음이 부유해질 때보다 가난해질 때 마음이 윤택해지기 때문입니다.나는 날마다 마음을 비워 내는 노력을 할 것입니다. 나에게 소망이 한 가지 있습니다. 나의 한 가지..

에냐 실버(Anya Silver)

퇴원  문이 내 뒤에서 미끄러지듯 닫히고, 세상이 다시 불타오르며 존재한다— 나는 다시 존재하고, 나 자신을 회복하고, 어두운 창으로 희미해지지 않은 햇빛을, 내 팔에 닿는 열기, 지구의 숨결. 바람은 갓 태어난 새끼 사슴을 핥는 암사슴처럼 나를 발끝까지 휘감는다. 등 뒤에서는 치명적 징후로 측정되는 나날, 입을 벌리고 팔을 뻗은 나날, 암으로 어린아이처럼 마른 남자의 밤의 울음소리, 복도를 통해 울려 퍼지는 빈 정맥 주사의 종소리. 내 앞에는 —신비롭고 평범한— 생명이 근육질의 날개로 고통을 견디고 있었다. 도로변으로 발을 내딛자 주황색 나방 한 마리가 조금 전까지 내 병실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장미 바구니 속으로 뛰어들었고, 꽃잎은 그 끈질긴 희롱에 굴복하여 황금색으로 다양하게 열렸다...

해운대(海雲臺)의 밤

​흐르는 곡은, 조용필 - 돌아와요 해운대('돌아와요 부산항에' 원곡) * * * * * * * * * * * * * * * 해운대(海雲臺)의 밤                                                         高巖 수줍은 달빛은구름 끝에 매달리고, 집 떠난 이른 그리움은수평선에 내려앉는데, 모래톱에 엉기는 하얀 파도만이내 심사(深思) 안고서소리높이 부서지누나. 해송(海松)의 솔내가 흐르는 이 길에낯선 갈매기는 왜 우는고.

골탕 먹다

"새로 부대에 전입해 온 새파란 소위들은 으레 골탕을 먹곤 한다.""휴가를 떠난 사람들은 현지 민박집주인의 푸대접과 바가지요금 씌우기 때문에 골탕을 먹었다." '골탕(을) 먹다'는 '크게 곤란을 당하거나 손해를 입다'라는 뜻이다.누군가를 곤란하게 하거나 손해를 입히게 만들기 위해 자주 쓰는 말이다. '골탕'이란 원래 '소의 머릿골과 등골을 맑은 장국에 넣어 끓여 익힌 맛있는 국물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골탕을 먹는 것은 맛있는 고기 국물을 먹는다는 말이었다.그러던 것이 '곯다'라는 말이 '골탕'과 음운이 비슷함에 따라, '골탕'이라는 말에 '곯다'라는 의미가 살아나고, 또 '먹다'라는 말에 '입다', '당하다'의 의미가 살아나서 '골탕 먹다'가 '겉으로는 멀쩡하나 속으로 남 모르는 큰 손해를 입게 되어 ..

태아이

낙태된 생명. 세상 구경도 못한 채로 죽은 슬픈 생명.  아이야 태아이야새가 되어 꽃가지에 앉거든네 울음도 물고 와서거기에 놓아두면두견화로 다시 피겠지 ...... 중략......늘 혼자서 떠도는 아이야해 저물녘 강에 나가면노을도 끌어다 강물에 적시며 놀거라어두워지면 그 강에별들도 띄우면서 놀거라아이야 태아이야 (김상현, '胎태아이를 위한 진혼곡', "노루는 발을 벗어 두고", p. 40)

선약해(宣若海) 장군

병자난에 의롭게 죽은 선약해(宣若海=左水使좌수사·亭忠詞정충사, 1579년 ~ 1643년) 장군은 자는 백종(伯宗), 호는 강의재(剛毅齋)이다.본관은 보성(寶城)이며 보성선 씨 시조 선윤지의 10세 손이다. 자는 백종(伯宗), 아버지는 임진왜란시 최경장(崔慶長)의 부장으로 의병활동과 이순신(李舜臣) 막하(幕下)의 진도군수로 노량해전에 공을 세운 부사(府使) 선의문(宣義問)이다. 1605년(선조 38년) 무과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1631년(인조 9년) 비변사낭청(備邊司郎廳)으로 있을 때, 문무의 재주를 겸비하였다고 추천되어 국서(國書)를 가지고 청나라 선양(瀋陽)에 사행(使行)하였다.이때 숭명배청(崇明排淸)의 대의(大義)에 입각하여 일을 처리하고 외국의 위력에 굴복하지 않았다 하여 돌아와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