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자난에 의롭게 죽은 선약해(宣若海=左水使좌수사·亭忠詞정충사, 1579년 ~ 1643년) 장군은 자는 백종(伯宗), 호는 강의재(剛毅齋)이다.
본관은 보성(寶城)이며 보성선 씨 시조 선윤지의 10세 손이다.
자는 백종(伯宗), 아버지는 임진왜란시 최경장(崔慶長)의 부장으로 의병활동과 이순신(李舜臣) 막하(幕下)의 진도군수로 노량해전에 공을 세운 부사(府使) 선의문(宣義問)이다.
1605년(선조 38년) 무과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1631년(인조 9년) 비변사낭청(備邊司郎廳)으로 있을 때, 문무의 재주를 겸비하였다고 추천되어 국서(國書)를 가지고 청나라 선양(瀋陽)에 사행(使行)하였다.
이때 숭명배청(崇明排淸)의 대의(大義)에 입각하여 일을 처리하고 외국의 위력에 굴복하지 않았다 하여 돌아와서 품계가 승진되었다.
이와 함께, 금편(金鞭 : 금으로 도금한 말의 채찍)·초구(貂裘 : 담비의 모피로 만든 갑옷)·옥배(玉盃) 등을 하사 받았다.
이후에 평산부사,밀양부사, 경상수군절도사(慶尙水軍節度使)로 임명되었다.
병자호란의 경기도 광주(廣州)의 쌍령 전투(雙嶺 戰鬪, 1637년 1월 28일, 인조 15년 정축년 1월 3일)는, 나이가 늙고 겁에 질려서, 사람을 대하면 곧 눈물을 흘리는 그런 허약한 좌병사(左兵使) 허완(許完)이 지휘하였었다.
나무방패로 몸을 가리고 접근해 오는 적과 대결하여 전위에 나선 포수들은 배당된 두 냥(二兩)씩의 화약을 모두 써 버리고, 화약조달과 지원군을 요구하고 있는 동안에 아군의 목책(木柵) 보루까지 접근해 왔다.
이때 안동영장(安東營將) 선약해(宣若海)가 홀로 적의 칼날을 당하며, 화살 30여 발을 쏘았으나 모두 방패에 맞았고, 살은 이미 다 되니 자기 자리에 딱 버티고 서서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적의 화살에 맞아 죽었던 것이다.≪燃藜室記述연려실기술≫
1830년(순조 30년) 오충사 사액과 함께 보성의 오충사(五忠祠), 장흥군 포충사, 고양시 오충사에 배향(配享)되었으며, 1862년(철종13년) 병조참판, 1873년(고종10년) 병조판서로 증직 되었다.
저서 선양일기(瀋陽日記)는 1630년 4월 3일부터 5월 23일까지 위문사로서의 일기로 당시(병자호란 전) 허베이(河北)과 선양(瀋陽)의 동향을 알려주는 중요한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