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가는 이야기 478

내설악 오세암(五歲庵) 이야기

강원도 인제군 북면에 있는 절, 내설악 오세암(五歲庵)은 백담사에 속해, 643년(선덕여왕 12년) 자장율사가 지었는데, 당시에는 관음암(觀音庵)이라고 불렸다.5살 된 아이가 폭설 속에서 부처의 도움으로 살아남았다는 전설이 있어서 '오세암'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노산(鷺山) 이은상의 말을 빌면, 한국의 절터 가운데 가장 좋은 오세암(五歲庵)에는 같은 나이 또래인 10대의 수도승 셋이 공부를 하고 있었다.그들은 반항적이던 속세의 기질을 불심으로 억누르기에는 너무나도 어린 동승(童僧)들이었다.독경(讀經)의 억양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그 논쟁은 사사로운 감정이 곁들이기에까지 발전하였고, 촛대를 들어 살상하는 일로까지 번졌다.피를 본 한 동승은 그 상황에 겁을 먹고 나머지 한 동료승마저 죽였다.절간 이웃에 암..

인물(人物)에 대하여

‘사람’을 대상으로 여겨 이르는 말로, 인물(人物)과 인재(人才)를 들 수 있겠다.재주와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인재(人才)'라 함에, 굳이 도참풍수설(圖讖風水說)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기후나 자연 지리적, 심리학적인 면과 연관을 맺는다.해변이나 평야부에 인물이 적고, 가장 인물이 많은 곳은, 표고 50미터 내외의 반산반야(半山半野) 지역이다.기후는 인물 배출과 뚜렷한 관계는 없으나, 1월 평균 등온선(等溫線)으로 따져, 0도 이상의 남해안 지방과 영하 10도 미만의 북관지방에는 인물이 현저히 적고, 또 연평균 강우량이 1,300미리가 넘는, 역시 남해안 지방과 800미리 미만인 북관지방에는 희소하다.이로써 쌀 주식지보다 보리 주식지에 인물이 비교적 많음을 알 수 있다.이 자연적인 조건은 환경의 혜택을 ..

조지훈(趙芝薰)의 해학과 연애관

서울 남산 서울타워 가는 길에서 1.5Km 되는 지점에 꽃동산이 있고, 그의 시비가 하나 세워져 있는 쉼터가 있다.그(1920년 12월 3일 ~ 1968년 5월 17일, 향년 48세)는 48세에 세상을 떠났지만, 주옥같은 시를 많이 남겼다.1946년 박목월, 박두진과 시집 청록집을 간행하면서 청록파라 불렸다.어릴 때 서당을 다녔고, 검정고시를 쳐서 혜화전문학교(지금 동국대학교)에 다녀서 일제식 교육은 전혀 받지 않았다.어릴 때 본명이 조동탁이었는데, 우스개 잡담도 시(詩) 못지않게, 육두문자도 조리 있고 지혜롭게 했다. 그의 강의에는 음담패설도 자주 등장했다.다음은 號(호)인 지훈(芝薰)의 유래에 대해 본인이 스스로 밝힌 내용이다. 내 호가 처음에는 지타(芝陀)였지.마침 여학교 훈장(경기여고)으로 갔는데..

조선의 천재들

언어를 따라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그 옛날에도 이 땅엔 뛰어난 인재들이 많았음을 느낀다.남녀노소 가림 없이 각 분야 수많은 인재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주로 가부장적 측면에서, 문인들 중에서 보면, 김시습, 율곡 이이, 정약용 등의 문인들과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실제로 불리었던 3명, 벽초 홍명희와 육당 최남선, 춘원 이광수 등이 "조선 3대 천재"라는 칭호를 누렸다.그들은 문인이자 언론인이었고, 2.8 독립 선언서와 3.1 운동 "독립 선언문"을 작성했으며, 홍명희는 만세운동을 주도했다.모두 한때 동아일보에 몸 담았었으며, 최남선이 발행한 '소년'지에 참여한 1910년 5월에 홍명희가 22세, 최남선이 20세, 이광수가 18세였다. 훗날 이들은 변절했다.항일에서 친일로, 홍명희는 1948년 ..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조선 초기의 학자(1435~1493). 자는 열경(悅卿)이며 호는 매월당(梅月堂) 또는 동봉(東峯)이다.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승려가 되어 방랑 생활을 하며 절개를 지켰다. 유교와 불교의 정신을 포섭한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한국 최초의 한문 소설 금오신화>를 지었고, 저서에 《매월당집》이 있다.  충남 계룡(鷄龍)의 한 맥이 스러진 부여 홍산(鴻山)의 무량사(無量寺) 앞 계곡에는 반체제(反體制)의 상징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글을 썼다는 벼루바위가 있다. 매월당은 시상을 종이에 옮기고는 흐르는 계류에 흘려보냈다.또 쓰고는 흘려보냈다.그는 그의 시를 그렇게 항상 흘려보냈다 한다. 작품이 없다고 예술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가치의 실천을 최초로 매월당이 하였다.이것은 발상부..

김유신(金庾信) 장군 이야기

시집도 안 간 누이동생이 아이를 배자, 김유신은 나라안에 이 불의를 널리 알리고, 나뭇가지 위에 아이 밴 누이동생을 얹혀 불을 질렀다.만약 이 불길의 연기를 선덕여왕(善德女王)이 빨리 발견하지 못했던들, 김춘추(金春秋)의 연인이던 그의 누이는 분살(焚殺)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당(唐) 나라와의 싸움에서 그의 둘째 아들 패장(敗將) 원술(元述)이 살아 돌아왔다.후공(後功)을 위해 못 죽고 돌아왔다 하니까, 김유신(金庾信)이 칼을 빼들고 참형(斬刑)하려 했다.이 역시 왕이 말려 의절(義絶)만 하고, 평생 보질 않았다.유신이 죽은 후에 원술이 돌아와 어머니를 뵙겠다 하니까, 도리를 못 지킨 자식은 자식이 아니라고 끝내 대면하지 않았다. 김유신이 조선시대 사람이라면 그런 의로움이 훌륭할 것도 없다.통일신라시대 ..

조선 시대의 여성 독서와 금서(禁書)

마님은 아랫목에 눕고, 작은 마님은 그 발치에 무릎을 세우고 얌전히 앉는다.윗목에는 나이 먹은 비녀(婢女)가 돋보기를 꺼내 끼고 이야기책을 읽는다. , , , , , , , , , , , 등이 고작이고, 열녀나 효녀 등 몇 권 이야기책에서 느끼는 감상과 얻는 교양뿐이었다.양반 가문에서는 읽지 못하도록 엄금되었던 금서(禁書)는 꽤 많았다.대표적인 금서가 과 朴氏夫人傳)>이다.도 가급적 읽지 못하도록 금지당한 이야기책 가운데 하나였다. 춘향과 이몽룡의 연애담과 수청을 강요하는 변학도에 맞서, 춘향이 절개를 지키는 내용은 여성의 굳은 정절이라는 주제를 표현하고 있지만, 춘향과 이몽룡의 질펀한 정사(情事) 장면이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었다.이제 어린 티를 벗어 난 16세들이 어찌 정사를 벌이는 장면이 그리도 적..

내시(內侍)이야기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가 그린 조선시대 내시  내시(內侍)는 고려 시대, 조선시대 임금의 시중을 들거나 숙직 등의 일을 맡아보던 관원을 말한다. 또, 거세당한 남자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도 쓰이고 있다. 내시는 임금을 곁에서 모시는 일종의 비서로 경호나 잡일을 해 주는 역할이었다.그 특성상 높은 품계를 받긴 어려웠으나 실권자와 친밀하여 권력이 강할 수도 있었고, 내시 생활을 끝내며 중신으로 옮겨오는 사례도 많았다.'환관(宦官)'과는 다르지만, 중화권에선 환관이 내시를 맡는 경우가 제법 흔한 편이었고, 한국에서도 조선시대의 영향으로 '환관=내시'로 통하기도 한다. "좋은 환관(宦官)"이란, 학문과 행정 능력이 있고 없음을 가지고, 기준으로 삼는 것이 아니었다.오히려 그런 능력, 학문 등은 좋은 환관이..

'도롱이를 빌린다'는 은어(隱語)

세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조선의 제7대 국왕인 세조는, 왕세자를 거치지 않고, 1453년 계유정난의 정변을 일으켜 즉위한 군주 수양대군이다. 그의 야심이 은연중에 드러나기 시작했을 때 일이다. 박팽년이 그에게 우비인 도롱이를 빌리러 사람을 보냈다.이에 도롱이를 빌려주며 시(詩) 한 수를 지어 보냈는데, 시사를 개탄하고 의를 결속하는 내용의 것으로 후세 절신(節臣)들 간에 『도롱이를 빌린다』는 말이 결의(結義)의 관용구가 되었을이만큼 명시가 되었다. 머리 위에는 분명히 백일(白日)인데도롱이를 주는 것은 뜻이 있는 것이요오호(五湖)의 연우(烟雨 : 안개비)에좋게 서로 찾아보고자 함인져 박팽년은 1453년 10월 계유정난을 전후해서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다. 1454년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1455년..

욕바위

조선 제14대 왕(1552~1608, 재위 1567~1608) 선조(宣祖)의 장인 김제남의 산소가 있는,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능촌 서쪽 덕가산 모퉁이 중턱에 "욕바위"라는 바위(사진)가 있다.옛날 강원 감사나 원주 수령들이 이 앞길을 지나다녔는데,그들이 통행할 때 백성들은 이 바위에 숨어,그들의 패정(弊政)이나 결함을 큰 소리로 고발하는 풍습이 있어 "욕바위"로 이름이 붙은 곳이다. 이 욕바위는 한국 정치사나 언론사, 그리고 법률사에서 주의되지 않던 흥미 있는 관습행위인 것이다.욕바위에서의 언론은 아무런 죄나 책임을 짓지 않는다는 면죄(免罪) 성향으로 간주되었다는 점이, 우발성의 욕바위가 아니라 욕바위라는 한 민주적 제도, 관과 민이 신랄하게 접하는 한 숨통을 트는 훌륭한 구실을 입증한다. 물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