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가는 이야기

내시(內侍)이야기

높은바위 2024. 9. 7. 06:49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가 그린 조선시대 내시

 

내시(內侍)는 고려 시대, 조선시대 임금의 시중을 들거나 숙직 등의 일을 맡아보던 관원을 말한다.

또, 거세당한 남자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도 쓰이고 있다.


내시는 임금을 곁에서 모시는 일종의 비서로 경호나 잡일을 해 주는 역할이었다.

그 특성상 높은 품계를 받긴 어려웠으나 실권자와 친밀하여 권력이 강할 수도 있었고, 내시 생활을 끝내며 중신으로 옮겨오는 사례도 많았다.

'환관(宦官)'과는 다르지만, 중화권에선 환관이 내시를 맡는 경우가 제법 흔한 편이었고, 한국에서도 조선시대의 영향으로 '환관=내시'로 통하기도 한다.

 

"좋은 환관(宦官)"이란, 학문과 행정 능력이 있고 없음을 가지고, 기준으로 삼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능력, 학문 등은 좋은 환관이 되는 데 방해가 되는 요소로 알려지고 있었다.

첫째, 용모가 고와야 했다.

미소년형에다 행실이 우아하고, 음성이 하이소프라노로 또렷해야 했다.

그리고 눈치나 반응에, '영리'와 '슬기'가 꽉 차 있어야 했다.

즉 여형적 조건(女形的 條件)을 모조리 구비하고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 "좋은 환관(宦官)"은 마치 여자가 남장한 것 같은 인상을 주게 마련이라 했다.

그런데 조금만 나이가 들면, 그 좋던 풍모도 이지러져, 마치 사내로 분장한 늙은 할미 같다고 한다.

사실, 궁밖에서 불의 중에 만날 때는, 할머니로 착각하기가 일쑤였다는 것이다.

 

환관에는 중년에 고자가 된 것과 젖아기 때부터 고자가 된 것 등 두 종류가 있다.

전자를 <정(貞)>이라 하고, 후자를 <통정(通貞)>이라 하였다.

후궁의 귀인들이나 궁녀들은 <정>보다는 <통정>을 더 좋아해 하였다.

일단 궁녀들의 사랑을 받게 된 <통정>은, 그저 순진한 소년인 체, 이들을 대해주기만 하면 되었다.

이들이 그들에게 뭣을 서비스하였는가는 우선 차치하고라도, 과거에서부터 궁중에 널리 성행되어 오던 동성애(同性愛) 풍조 그것과는, 약간 이질적인 사랑의 풍토를 따로 형성해 내었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다.

 

환관들은 이미 고자가 되었을 때부터 정상인으로서의 음성을 상실하게 된다.

특히 어렸을 때, 거세를 당했을 경우는, 젊은 여성의 목소리와 전혀 구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수염이 없는 것도 그 특징의 하나이다.

중년에 이르러 거세를 당했을 때는, 백 날도 못 가서 검실검실하던 수염이 말끔히 씻은 듯 없어지고 만다.

젊을 때 거세하면 살이 비대해지는 것도 그 특색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 살은, 가다듬어진 살이 못되고 근육이 못되기 때문에, 힘으로 작용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이 비대해진 살은 오래가지 못하고, 중년을 넘어서면 갑자기 살이 내려, 표피(表皮)가 온통 주름살로 뒤덮였다.

그래서 마흔 살만 지나도, 환갑을 넘어선 사람처럼 보이기가 일쑤였다.

 

이 같은 육체적 특징에 수반하여, 성격에 있어서도, 특수한 변화를 가져왔다.

첫째, 지극히 하찮은 일을 가지고서도, 곧잘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서도, 곧잘 화를 내었다.

둘째로는, 강한 자 앞에서는 꼬리를 살살 흔들고, 자신의 열등감과 허약함을 내세워 동정을 구하려 든다.

셋째는, 이와 반대로 약한 자―이를테면 유순한 여인이나 아이들에게 대해서는, 지나치게 애정을 갖고, 개나 고양이 같은 짐승을 지나치게 좋아한다.

 

대체적으로 환관들은 자기의 비정상적인 신체적 조건을, 아버지 탓으로 돌리고, 이를 증오한다.

그 증오의 역작용인지는 모르나, 어머니에 대한 애정 및 효양심은 굉장하다.

또 한 가지, 이들은 공통된 열등감을 가지고 있음에서인지는 모르나, 단결심이 유난히 강하다.

이 단결심은 연합된 궁중파워로 곧잘 나타나, 대신들의 강한 권력과 맞서기가 일쑤였다.

물론 이 같은 집단적 자각은 궁정이란 특수환경에 있으며, 군주의 후광을 배경으로 삼고 있을 때에만 가능하였다.

일단 왕궁을 떠나게 되면 천하에도 제일가는 약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경복궁 곁의 효자동은, 환관의 집단 취락촌으로, 화자(火者-고자의 별칭) 동의 음이 전화하여, 효자동이 되었다는 설이 있고, 창덕궁 곁의 봉익동도 과거에 환관촌이었다는 설이 있다.

지금도 파주군 교하면 당하리와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의 전형적인 내시촌에는, 한말 갑신정변, 갑오경장 등의 개화바람에 궁에서 몰려나와 살았던 내시들의 양자 양손들이 지금도 더러 동정처(고자나 환관들의 처)를 데리고 살고 있다 한다.

서울 신촌에도 3대에 걸쳐 동정처를 거느렸던 그들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