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님은 아랫목에 눕고, 작은 마님은 그 발치에 무릎을 세우고 얌전히 앉는다.
윗목에는 나이 먹은 비녀(婢女)가 돋보기를 꺼내 끼고 이야기책을 읽는다.
<심청전>, <숙향전>, <박씨 부인전>, <옥루몽>, <구운몽>, <사씨남정기>, <홍길동전>, <장화홍련전>, <유충렬전>, <삼국지>, <조웅전>, <흥부전> 등이 고작이고, 열녀나 효녀 등 몇 권 이야기책에서 느끼는 감상과 얻는 교양뿐이었다.
양반 가문에서는 읽지 못하도록 엄금되었던 금서(禁書)는 꽤 많았다.
대표적인 금서가 <가루지기타령(변강쇠전)>과 <박씨 부인전(朴氏夫人傳)>이다.
<춘향전>도 가급적 읽지 못하도록 금지당한 이야기책 가운데 하나였다.
춘향과 이몽룡의 연애담과 수청을 강요하는 변학도에 맞서, 춘향이 절개를 지키는 내용은 여성의 굳은 정절이라는 주제를 표현하고 있지만, 춘향과 이몽룡의 질펀한 정사(情事) 장면이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 어린 티를 벗어 난 16세들이 어찌 정사를 벌이는 장면이 그리도 적나라한지...
그 어린 나이에 어디서 그런 것들을 습득했는지...
이 금서들의 공통된 요소를 찾는다면, 반체제(反體制)와 휴머니티이기 때문이다.
<박씨 부인전>의 박씨 부인은 한 끼에 한 말의 곡식을 먹고, 오륙 명이 할 일을 혼자서 해내는 여장부다.
이 땅의 부녀자들이 그 이야기책 가운데 가장 통쾌하게 여겼을 대목은 바로 남편을 저주하는 대목일 것이다.
이 여장부는 "지식이 져다지 업슬진대 효와 충심을 엇지 알며 안민지도를 알으시리요···. 낭군 갓흔 남자는 불워 아니 하나이다"라고 맞대놓고 말한다.
남편이 몇백 첩을 거느려도 투정 말고 공경하라던 모럴 풍토에서, 이 박씨 부인은 반체제의 영웅일 수밖에 없고, 이 책을 읽는 한국의 부녀자들은 어떤 공감의 합치점을 찾아 술렁거리는 개화의 태동을 느꼈을 것이다.
<가루지기타령(변강쇠전)>의 경우는 더 심하다.
무수히 남편을 갈아친 천하의 음녀(淫女) 옹녀와 삼남을 휩쓴 천하의 잡놈 변 강쇠가 정석관(靑石關)에서 만나 짝을 짓고 누가 잡짓을 더 잘하느냐, 내기 행각을 한다.
결국 옹녀가 승리한다.
"십 년을 곧 굶어도 남의 계집 바라보며 눈웃음 하는 놈만 다시 아니 보거드면 내일 죽어 한이 없다"하는, 변 강쇠의 강새암으로 에로 콘테스트는 옹녀 편이 이겼다.
변 강쇠가 죽자, 송장도 치우기 전에 옹녀는 나뭇잎 파릇파릇한 계곡에 가랑이를 널펀히 벌리고 앉아 다시 뭇 사나이들을 꾄다.
이 이야기책의 저의는 끝없이 분방한 여성의 성적 자의(性的恣意)가 아니라, 당시 여성풍토에 대한 극도의 반체제를 묘사했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이 같은 금서들이 은연중에 끼친 인간 발견의 공은 어쩌면 상상보다 훨씬 컸을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