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초에만도 불학(佛學)을 하는 것이 그다지 죄스럽거나 천한 것은 아니었다.혁명의 방편으로 유교를 국교로 삼아 척불(斥佛) 정책을 썼던 것으로 여말 이조초의 저명한 학자들은 이색(李穡), 권근(權近)처럼 유불(儒佛) 겸학들을 하였다.그 후 김종직(金宗直)이 창도 하여,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유교의 도학이 크게 밝아지고, 조광조 이후에는 우동마졸(牛童馬卒: 牛童은 소를 치는 아이란 뜻으로, 우동마졸이라 함은 비천한 일에 종사하는 이를 일컫는다) 까지도 불학하는 것을 천하게 알고, 수치로 여겼던 것이다. 이때 노수신(盧守愼=영의정·亭書院정서원)이 오랜 유배(명종 때 을사사화의 원인 제공과 양재역(良才驛) 벽서 사건이 겹쳐 가중처벌로 유배 귀양)에서 돌아와, 홀연히 선학(禪學)을 하여 당시 이율곡을 비롯한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