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초에만도 불학(佛學)을 하는 것이 그다지 죄스럽거나 천한 것은 아니었다.
혁명의 방편으로 유교를 국교로 삼아 척불(斥佛) 정책을 썼던 것으로 여말 이조초의 저명한 학자들은 이색(李穡), 권근(權近)처럼 유불(儒佛) 겸학들을 하였다.
그 후 김종직(金宗直)이 창도 하여,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유교의 도학이 크게 밝아지고, 조광조 이후에는 우동마졸(牛童馬卒: 牛童은 소를 치는 아이란 뜻으로, 우동마졸이라 함은 비천한 일에 종사하는 이를 일컫는다) 까지도 불학하는 것을 천하게 알고, 수치로 여겼던 것이다.
이때 노수신(盧守愼=영의정·亭書院정서원)이 오랜 유배(명종 때 을사사화의 원인 제공과 양재역(良才驛) 벽서 사건이 겹쳐 가중처벌로 유배 귀양)에서 돌아와, 홀연히 선학(禪學)을 하여 당시 이율곡을 비롯한 선비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율곡은 이 노수신의 불학을 풍자하는 시를 썼고, 이에 준열한 답시를 지어 논쟁이 붙기까지 하였다.
그로써 학문의 자유를 위한 용기가 높이 평가되었고, 후대에 도학자로서 선학을 하는 풍조를 있게 하였다.
이 같은 용기를 두고 「주자(朱子) 때에 육상산(陸象山:중국 남송의 유학자)이 출현한 것과 방불하다」고들 말했다.
용서받기 어려운 죄와
고치기 어려운 병이 들고
불충신 불효자가 되었네
귀양살이 삼천 사백 일이
오히려 다행이요
생년월일인 을해병진(乙亥丙辰)이 부끄럽다.
네 노수신아 죽지 않고
군은(君恩)을 뭣으로 갚을 테냐
진도(珍島) 유배생활이 시작될 때 지은 자조의 시(詩)다.
그가 진도 유배살이를 할 때, 진도 군수 홍인록(洪仁祿)은 집권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백방으로 노수신에게 모질게 굴었다.
"죄인이 어찌 옥식(玉食=쌀밥)을 먹을 수 있나." 하고 산간에 있는 고을에서 일부러 좁쌀을 바꾸어다 주었다.
하룻밤에는 달이 밝은데, 공이 아이종으로 하여금 피리를 불게 하였더니 군수가 말하길,
"죄인이 어찌 연락(宴樂)을 할 수 있느냐"하며 그 피리분 아이를 잡아가두기도 했다.
노수신이 유배에서 풀려나, 고직에 오르자 언관(言官)들이 이 유배시절에 악독하게 굴었던 홍인록을 공박하여, 여러 해 동안 집에 있게 했는데, 그가 극력 구해하여 풍천(豊川) 부사로 승진시켜 주니, 범인이 못할 것이라고 감탄들을 하였던 것이다.《長貪胡撰장탐호찬·涪溪記聞부계기문》
부모를 모시고 있을 때는 손수 부엌에 들어가 밥을 짓는 주방효도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효자이기도 하다.
한데 그의 유불(儒佛) 학문과 과단성 없는 성품 때문에 적도 많았다.
특히 정여립(鄭汝立) 같은 적신을 추천한 것 등이 흠이 되어, 말썽 많은 일생을 살기도 한 그였다.
"20년을 유배지에서 고생한 나머지 기절(氣節)이 다 녹아버렸다. 또 그를 공장(工匠)에 비긴다면 손끝을 맞잡고 공식(空食)하는 사람이다. 비록 이익은 없으나 또한 해도 없다."《李珥이이》
"노정승의 침(唾)은 종기 다스리는데 쓰는 것이 좋을 것이다."《崔永慶최영경》라고 혹평을 하였다.
이 말은 대개 종기에는, 말을 하지 않은 침을 쓰면 좋다고 하므로, 노수신이 정승으로서 실행한 것이 없으므로 이같이 기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