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가는 이야기

다산 정약용(丁若鏞) 이야기

높은바위 2024. 12. 25. 07:35

 

신유박해 때 동복형 정약종(丁若鍾, 조선의 실학자이자, 가톨릭의 복자, 1760~1801)의 순교와 더불어,

또 다른 이복형 정약현(丁若鉉, 1751~1821)은 신지도(薪智島)에,

동복형 정약전(丁若銓=兵曹佐郞병조좌랑, 1758~1816)은 흑산도(黑山島)에,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강진(康津)에 유배되었다.

 

「여(與)함이여 마치 겨울에 냇물을 건너듯이, 유(猶)함이여 마치 너희 이웃을 두려워하듯이」라는 《도덕경(道德經)》의 글귀를 따라 '여유당(與猶堂)이라 호를 삼기도 한 정약용은, 경세치용(經世致用)의 대강 속에 그의 학문을 재구성한 유형원(柳馨遠), 이익(李瀷) 이래의 실학자였고, 또 그의 실학을 실천했던 정치가이기도 했다.

곡산(谷山) 부사 때 유지와 겨를 써서, 얼음을 얼구어 여름에 이용하고, 그 얼음을 팔아 공금으로 썼던 것 등이 그 좋은 실천사상가로서의 본보기다.

 

또한 그는 주체문장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그는 한국적인 주체적 시맥을 짚고, 말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걸핏하면 중국의 고사(故事)만 쓰기를 좋아함은 누습이 아닐 수 없다. 반드시 우리 문자 중에서 널리 모아 골라서 고증을 한 연후 써야만 세상에 이름낼 수 있을 것이니 유득공(柳得恭)의 《십육국회고시(十六國懷古詩)》가 중국에서 발간된 것은 그 때문이다."

 

무척 멋도 있었다.

이유수(李儒修), 이치훈(李致薰), 한치응(韓致應) 등 14명의 소장의 동지들과 죽란시사(竹欄詩社)를 맺고,

그 시사의 규약을 정해, 살구꽃이 처음 피면 한번 모이고, 복숭아꽃이 필 때와 한 여름 참외가 익을 때 모이고,

가을 서연지(西蓮池)에 연꽃이 만개하면 꽃구경하러 모이고, 국화꽃이 피고 있는데 눈이 내리면 이례적으로 모이고,

또 한 해가 저물 무렵 분에 심은 매화가 피면 다시 한번 모이기로 했던 것이다.

 

그는 거대한 저서를 남기고, 회혼(回婚) 날을 맞았다.

친족과 문하생들이 이 잔치를 벌이려 법석대고 있는데 그날 그는 숨을 돌린 것이다.

경사가 상가로 돌변한 것이었다.

남긴 유서는 다음과 같이 소박한 것이었다.

"묘 앞에서는 비를 세우지 말고, 망주(望柱)와 상석(床石)만을 두고, 수의는 베 대신 무명으로 하며, 염할 때 몸을 끈으로 묶는 것은 신체에 대한 모독이니 몸을 편하게 관에 넣으라."

그가 주자학적 예론에의 저항이 이 조그마한 유서에서도 엿보인다.

 

이 유서를 가습으로 삼아, 그의 후손들은 염을 할 때 묶지 않고 편하게 묻는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