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가는 이야기

권위주의에의 고려적(高麗的) 저항

높은바위 2024. 12. 28. 07:29

 
근대 서양정치사에서 <인간정치>로 표현되는 정치의 권위주의를 배격하는 한 사조가 있었다.
한국의 행정은 강자인 치자(治者)가 약자인 피치자에 군림하여 권력과 권위에 의한 강압성을 치리(治理)의 원천으로 삼아왔다.
한국이도(吏道)와 관계(官階)의 엄한 법도는 이와 같은 치리(治理)로 해석이 된다.
모든 제도가 관리의 권위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강력히 편성되었고, 한국정치 발달사는 그 권위보장이 보다 많이 보장되는 과정의 표현이었다.
민주주의 정치사상도 이 같은 권위주의 사상에의 저항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한국의 정치적 고질, 그리고 치자와 피치자의 상관관계의 부정적 가치의 모든 나쁜 요소도 이에서 비롯되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한데 이따금 이 권위주의 정치에 개별적인 저항을 했던 정치가를 발견할 수가 있고, 그 같은 당대에 있어서는 파격적 반체제적 행동이 현대에 크게 어필하며 그 같은 인간적 용기가 마냥 우러러 보이는 것이다.
 
그런 전형적인 사람으로, 고려 충렬왕 때의 명신 주열(朱悅 : 知都僉議府事지도첨의부사, 版圖判書판도판서)을 들 수 있다.
그가 충청 · 전라 · 경상 3도의 안렴사(安廉使)였을 때, 당시 내신(內臣)인 최중경(崔仲卿)은 지방에 내려와 무척 권위와 법도에 까다로웠다.
문안드리는 것, 접대하는 것에 결례가 조금만 발견되면 호통을 치고 당장에서 장결(杖決)을 하곤 했다.
주열은 이에 생리적인 저항을 느꼈다.
그는 그 내신 앞에 일부러 사복을 아무렇게나 입고, 발을 뻗고 앉아 긁적거리고, 손을 요속에 더듬어 이를 잡아내는 흉내를 내곤 하였던 것이다.
이 내신은 질려, 앙천폐구(仰天閉口)하고 그 지방을 떠나갔다 했다.
 
어느 날 재상(宰相)과 같은 반열에 앉아 하리(下吏)의 보고를 들은 일이 있었다.
이 재상이 보고를 듣고 하명(下命)을 할 때, 그 하리가 땅에 엎드리지 않은 것을 호통쳤다.
이에 주열은 "재상의 말에 땅에 코를 대어야 한다면, 임금의 말을 들을 때는 땅을 파고들어 앉아야 하지 않겠소" 했다 한다.
 
이같이 윗사람의 권위에 저돌적이면서 사소한 하리(下吏)의 실수에는 폭을 보였다.
어명을 띈 관리가 자는 방에 불이 나면, 그 지방관은 대역률(大逆律)로 다스리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그가 이런 변을 당했을 때, 그 이튿날 일체 그 불 얘기를 입밖에 내지 않았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그가 가는 곳마다 선치(善治)의 이름이 날렸음은 치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관민 간의 어려운 권위를 깨뜨리고, 접근하고 또 접근해 오도록 하여 인간을 권위에 선행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코는 귤껍데기 같고, 무척 추모(醜貌)였던 것 같다.
원(元) 나라의 제국(齊國) 공주가 처음 고려에 와서, 군신을 불러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 이 주열을 보고 놀라, 저런 늙은 귀신같은 이를 안전에서 볼 수 없도록 하라고 분부할 지경이었다 한다.
이때 임금은 비록 귀면이지만, 마음은 청수같이 맑다고 추기자, 술을 한잔 손수 권했던 것이다.
 
말년에 그는 이 제국공주의 말을 되뇌며, 공주가 나의 추한 마음을 가장 잘 갈파했다고, 보다 깊은 인생의 경지에서 뭣인가 크게 느꼈었다고 한다.
이 말은 추한 소크라테스의 얼굴을 보고, 한 아테네의 관상쟁이가 세상에서 가장 흉악한 마음보의 소유자라고 손가락질하자, 정말 용한 관상쟁이라고 극찬했다던 고사를 연상케 한다.
 
그는 무척 술을 좋아했던 것 같다.
고려사에서 보면 하루도 술을 거르지 않았다 하며, 가뭄이나 국상(國喪)이 있어 주금(酒禁)이 있을 때도, 그에게 국한해서만은 묵인해 주었다 한다.
묵인해 주기 전에 구애받지 않고 마셨다 한다.
이것은 법도나 모럴이나 국법 이전에, 인간을 선행시킨 그의 소신의 한 발로로도 볼 수가 있다.
 
죽기 직전에 그의 아내는 술을 권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이건 전별주(錢別酒) 구나"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