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려던 시점에 조선의 의복 문화와 상거래 관행에 변화를 일으킨,
문익점(文益漸=司議사의·提學제학·享丹城道川書院향단성도천서원·江城祠강성사·楮山書院저산서원·松秀書院송수서원, 1329년 2월 8일(충숙왕 16년) ~ 1400년 2월 8일(정종 2년), 향년 70세) 이야기이다.
진주 남강(南江) 상류 경남 산청군 신안면(新安面) 원터는 문익점을 모신 도천서원의 옛터라서 붙은 마을이름이고,
그곳에서 五(오)리 남짓 강 따라 올라가면 단성면(丹城面) 사월리(沙月里)에 이르는데,
이 마을의 속칭 효자리(孝子里)는 문익점의 효자정각(孝子旌閣) 때문에 붙은 이름인 것이다.
이 마을에는 문익점의 면화시배사적비(棉花始培寺跡碑)가 그 시배지에 서 있다.
그가 한국변방을 소란케 한 홍건적의 실황을 보고하기 위해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에 갔을 때,
마침 공민왕의 배원책(排元策)에 대한 응징문제가 원나라 조정에서 논의되고 있었다.
공민왕 폐위론까지 대두되자, 문익점은 이를 한사코 반대하여, 원제(元帝)의 노여움을 사,
코치(交趾교지=현재 越南월남)로 유배당했던 것이다.
그 유배에서 돌아올 때, 붓통 속에 넣어온 목화씨 몇낱으로 한국에 의복 혁명을 일으킨 것이었다.《事蹟碑사적비》
원나라는 말을 안 듣는 공민왕 대신 덕흥군을 새로운 고려의 왕으로 옹립해 버렸다.
결국 이 문제 때문에 문익점과 그 일행들이 사신으로 원나라에 갔고, 공민왕의 반원 자주 정책에 반발한 원나라 조정에서 충선왕의 손자인 덕흥군을 고려 왕으로 임명해서 군사를 주어 고려로 보냈다.
이에 원나라 조정에 있던 사신들은 덕흥군을 왕으로 지지하는 파와 공민왕을 왕으로 지지하는 파로 나뉘었다.
1차 사신단은 기황후와 원나라 황실에 설득되어서 덕흥군 지지파로 임시 조정까지 꾸리고 앉아있었고, 2차 사신단에 대해서 포섭이 이뤄졌는데 이들이 갈렸다.
이 중 대부분은 1차 사신단에 합류하였으나, 공민왕을 지지했던 홍순, 이자송, 황대두, 김유는 돌아왔고, 이공수는 붙잡혀 있으면서도 협력을 거부하면서 결국 덕흥군파의 움직임을 고려 조정에 알려서 공민왕이 이를 대처하는데 최대 공로를 세웠다.
그러니 이공수를 제외한 나머지 잔류 2차 사신 일행은 원래부터 자리 잡고 있던 1차 사신 일행과 엮여 덕흥군파가 되었는데, 잔류했던 문익점 역시 덕흥군파였다.
원나라가 보낸 덕흥군의 군대는 고려에 진입하다 압록강 근교에서 최영과 이성계에게 패배했고, 결국 원나라는 이들에 대한 송환 결정을 내린다.
어쩔 수 없이 고려로 돌아온 후 문익점은 파직되어서 시골로 내려가게 된다.
문익점은 운이 좋은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문익점의 행동은 역모죄로 몰아서 여지없이 극형에 처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사형이나 유배가 아닌 파직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파직 후 고향으로 돌아와서 딱히 할 것도 없으니 목화 재배를 시작해 목화의 개량과 보급에 있어 일대 혁신을 가져와 민간 백성들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했다.
결국 1375년(우왕 1년) 조정으로 돌아와서 관직에 올랐는데, 어디까지나 목화 보급 공로 덕분이었다.
이후 다시 문익점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는데 온건파 사대부와 함께 하느냐, 급진파 사대부와 함께 하느냐였다.
그런데 이번에도 문익점은 정몽주 등 온건파 사대부와 입장을 같이 했는데, 결국 급진파 사대부가 정권을 잡아 이들이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문익점은 이후 조선에서 관직에 오르지 못했고, 조선 건국에 반대해 초야에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러나 그의 사후 조선 조정에서는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관직, 강성군(江城君) 봉호, 시호로 충선(忠宣)을 더해주고 후손에게도 벼슬을 주었다.
그는 이조 정종 2년에 70세로 바로 생일날 별세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