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가는 이야기 478

죽어서도 울었던 서화가(書畵家)

- 2015년 이후 복원된 삼전도비(三田渡碑)의 모습(서울 송파구 잠실동) -  삼전비(三田碑)는 병자호란 때 청(淸) 나라에 패배해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고, 청태종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적은 비석이다.조선 인조 17년에(1639)에 세워진 비석으로 높이 3.95m, 폭 1.4m이고, 제목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로 되어 있다. 이 삼전비(三田碑)의 비명을 쓴 서화가가 오준(吳竣 = 禮曹判書예조판서·提學제학)이다.오준(吳竣)은 이조참판을 지낸 오백령(吳百齡)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증 참의(贈參議) 고경룡(高慶龍)의 딸이다.  그는 당대 절세의 명필이었기로 호장(胡將) 앞에 화의를 표하는 굴욕의 삼전비(三田碑) 문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그는 이 비문 쓴 것을 두고 마음이 괴로웠다.이 굴..

전남 무안의 배 씨 부인의 기개(thymos)와 수치(aidos)

열두 살 난 지립(之立)과 열 살 난 지발(之發),이 두 아들이 왜적(倭賊)이 쳐들고 있는 작두 아래,목을 나란히 하고 눈을 멀뚱 거리고 있다. 그 네 개의 눈을 곳간(庫間)에 숨어서 보고 있는 어머니 배(裵) 씨(務安士人무안사인 尹起윤기의 妻처)는, 그가 제 발로 걸어 나가 왜적에게 겁탈을 당하면, 이 두 아이가 살고, 숨은 채 버티고 있으면 작두에 두 아들의 목이 동강이 나는 택일(擇一)의 시련에 놓인 것이다.프랑스 왕국의 비극작가 장바티스트 라신(Jean Baptiste Racine, 1639년 12월 22일 ~ 1699년 4월 21일)의 비극(悲劇)에서 헬렌적(情的정적)인 것과 헤브류적(理的리적)인 것의 택일을 둔, 이 같은 갈등이 곧잘 소재(素材)가 되었었다.이 한국의 어머니 배(裵) 씨는, 그..

이 아침, 톨스토이의 말들을 기억하며

권력을 잡고, 돈과 높은 자리를 가지며, 호사한 생활을 하는 일이 일생일대의 훌륭한 목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그 목적에 도달할 때까지의 일이고, 사람이 그런 것들을 입수하자마자 그것들은 그것 자체의 가치 없음을 드러내고 끌어 붙이는 힘을 차츰 잃어 가는 것이다.즉 그런 것은 멀리서 볼 때만 형태와 아름다움을 감추고 있는 구름 같은 것이다.구름 속에 들어가면 담박 아름답다고 생각되던 것은 모두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악인은 선인에 대해서 늘 권력을 휘두르며, 늘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 모든 정부와 지배 계급이 첫째 군대를 필요로 하는 것은, 국민의 요구에 의한 것이 아닐뿐더러 때로는 국민에게 정면으로 대립하고, 정부와 지배 계급만으로 이루어진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군대는 주로 외부로부터 나라를 지..

기둥에 머리찧는 자학효도(自虐孝道)의 정여창(鄭汝昌)

고려말기 유학자 圃隱(포은)  정몽주(鄭夢周) 뒤에 우리나라 성리학이 실로 김굉필(金宏弼)로부터 주창됐는데, 뜻을 같이 한 이가 정여창(鄭汝昌: 조선 성종 때의 문신ㆍ학자(1450~1504). 자는 백욱(伯勖). 호는 일두(一蠹). 시호는 문헌(文獻). 성리학의 대가로 경사(經史)에 통달하였다. 무오사화에 관계되어 귀양 가서 죽었다. 정구(鄭逑)의 ≪문헌공실기(文獻公實記)≫에 그 유집(遺集)이 전한다.)이다.김굉필이 이(理)에 밝고 정여창은 수(數)에 밝았는데 불행한 때에 가서 비명에 죽으니 아깝도다.푸르른 하늘이라 어떻다 말하랴. ≪丙辰丁巳錄(병진정사록)≫  그의 아버지 정육을(鄭六乙)은 이시애의 난에 죽고 편모슬하에서 살았는데, 그의 어머니에 대한 그의 효도는 한국의 한 극한적인 효도방식으로 주의를 ..

대가족주의(大家族主義)의 비정사(非情史)

경남 하동(河東) 옥종면(玉宗面) 종화골에서 안계골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다."가마고개"로 불린다.광해군 때 일이라 구전된다.남명(南冥) 조식(曺植)의 학통을 이어받은 종화골의 한 명문 집안에서 딸을 출가시키고자 가마행차를 하였다.공교롭게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통을 이어받은 안계골의 한 명문 집안에서도 딸을 출가시키고자 가마행차를 하였다.이 양가는 수백년래 명문을 두고 다투어 왔으며 학통(學統)을 달리 한 것도 그 적대의식 때문이었다.이 적대문명의 가마가 하필이면 이 고갯마루에서 부딪치게 되었다.비록 좁은 고갯길이긴 하지만 가마가 못 비켜 갈이만큼 좁진 않았다.고개 아래는 낭떠러지로 남강(南江)의 지류(支流)인 덕천강(德川江)이 흐르고 있고―. 어느 한쪽의 가마가 비켜주거나 비켜가기만 하면 아무 일..

효자 박실(朴實) 이야기

박실(朴實)의 효행에 관해 기록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와 "동각잡기(東閣雜記)"의 기록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그의 아버지 박자안(朴子安)은 태조 때 경상, 전라도의 도안무사(都按撫使)로서 항복한 왜적들의 처리를 한 일이 있다.그때 왜인에게 군사기밀을 알리는 말을 하였기로 참형(斬刑)을 당하게 되었다. 이때 한 소년이 그 경비가 삼엄한 구중궁궐을, 애걸, 매수, 월색(越穡), 야행(夜行) 등 갖은 수단을 감행하여 태조의 대전 앞까지 잠행하였던 것이다.대뜸 통곡을 하니, 태조가 나와볼 수밖에 없었다.그는 땅에 뒹굴며 아버지의 구명을 애걸하였다. 태조는 이 궁궐을 뚫고 들어올 수 있었던 그 소년의 효행에 압도되어 버렸다.태조는 한시바삐 구명사절을 보냈다. 교서가 당도하던 날에, 관에서 자안(朴子安)의..

벙어리 그릇 아도(啞陶)

이제는 쉽게 볼 수는 없지만, 지금도 서울 원주민의 집이나 인사동 도기 파는 곳에서, 주먹만 한 "아도(啞陶)"라는 질그릇을 가지고 있는 분을 볼 수 있을 것이다.저금통 모양의 구형(球形)인, 이 질그릇 언저리는  "아도구(啞陶口)"라 하여, 저금통의 전구(錢口)처럼 기다랗게 입이 찢겨 있고, "아도귀(啞陶耳)"라 하여 양쪽에 구멍이 뚫어져 있다.즉 귀인 셈이다. 며느리가 말대꾸를 잘한다든지 입심이 좋고 하면, 그것이 못마땅한 시어머니는 이 아도를 며느리에게 던져 줌으로써 무언의 훈계를 하였고, 또 구설수로 화를 당하면 아도 100개를 사서 문간에 쌓아놓기도 하였다.입이 있되 말을 말고, 귀가 있되 듣지 않는 무간섭 안일주의의 상징으로서, 또한 가정교육의 귀감으로 삼았던 질그릇이다.특히 사화(士禍)가 심..

파랑새 이야기

동양의 파랑새는 창안(鶬鴳)이라 하여, 입춘 무렵부터 울기 시작하여 입하 무렵에 울음을 그치는, 봄에만 노래하는 봄 새다.즉 파랑새는 봄의 정수(精髓)다.서양에도 파랑새가 있는데 구미(歐美)에 주로 분포되어 있다.하지만 파랑새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상징적인 새인 것이다. 서양에서는 도르노이(1705년 사망)의 동화 속에서 아름다운 여인, 동경의 대상으로 상징화하였는데, 벨기에의 작가 모리스 마테를링크(Maurice Polidore Marie Bernard Maeterlinck, 1862년 8월 29일 ~ 1949년 5월 6일)에 의해 붙잡을 수 없는 행복으로 상징화되었다.가난한 초부(樵夫)의 아들 딸, 틸틸과 미틸 남매가 크리스마스 전야에 파랑새를 찾아 헤매는 꿈을 꾸다가 문득 깨어나, 자기들이 기르던 비..

무작개의 저항과 반호주의(反胡主義)

한말(韓末)에 되소금[胡鹽:호염]이라 하여, 청나라에서 밀수되는 식염이 나라안에 꽤 나돌았다.재래염보다 한결 짜고 아울러 부피가 작기 때문에 소금이 소중한 산골사람들에게는 십상이어서 소금장수들은 살 판이 난 것이다. 그런데 춘천서 양구로 가는 소금길만은 이 되소금장수가 오갈 수 없었다.소양강 건너 마작산(麻作山) 줄기의 뜨내리재 부침치(浮沈峙)를 넘어야 하는데, 이 되소금 짐을 지고 넘어가노라면, 뜨내리재가 떴다 내렸다 들쑥날쑥하여 소금짐을 뒤엎어놓고 만다고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이었다.만약 호인(胡人)이 이 재를 넘는다면, 그 뜨내리의 조화 때문에, 머리가 돌아 발광하고 만다고도 구전되어 왔다. 그러기에 되소금이건 청인이건 호(胡)와 관계된 것이면 이 가까운 뜨내리재로 가질 못하고 두곱이나 더 먼 낭천..

명(明)나라 여인 이야기

병자호란 때 청(淸, 만주족이 지배했던 중국의 왕조, 1616~1912) 나라로 인질로 잡혀간 소현세자(昭顯世子, 인조의 맏아들, 1612~1645)에게 정을 쏟았던, 한 명나라 사족(士族)의 젊은 여인이 있었다.이름은 굴씨(屈氏)로만 알려졌다.세자가 연경(燕京,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北京)의 옛 이름)에 있을 때 접근, 귀국할 때 한국에 따라와서 이내 서울 성밖에서 살다가 죽어, 그녀의 무덤이 고양(高陽)에 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인질로 있을 때 소현세자의 나이가 20대고, 또 굴씨도 묘령이었다.명나라 사족(士族)의 딸인 굴씨의 저항과 역시 호국에게 붙잡혀온 이국(異國)의 왕자가 갖는 저항은 손쉽게 공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소현세자가 돌아올 때 동행해서 같이 올 만한 친근성은 그것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