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甲申政變 : 조선 말기, 1884(고종 21)년에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 등의 개화당이 독립적인 정부를 세우기 위하여 일으킨 정변을 이르던 말. 이 일이 일어난 지 이틀 만에 민 씨 등의 수구당(守舊黨)과 중국 청나라 군사의 반격으로 실패하였다.)의 실패로 샌프란시스코에서 가구상의 광고전단을 붙이고 다녔던, 전라도 동복군(현 보성군) 출신 서재필(徐載弼 : 1864년 1월 7일 ~ 1951년 1월 5일)은 어느 한국사람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소식을 들었다.
둘째 아우 서재창(徐載昌=弘文館 副提學홍문관 부제학)은 연좌제의 포망(捕網)을 피해, 상노(床奴)의 등불을 앞세우고, 안동병문(安洞屛門)을 빠져 피신하려다가 붙잡혀 타살당했다.
그의 부인 광산김 씨(光山金氏)는 양가(養家=서재필은 養子出系양자출계 하였었다)에서 쫓겨나 연산(連山 : 충청남도 논산시에 있는 면)의 친정으로 찾아갔는데, 친정 부모들이 대역(大逆)의 죄인이라 해서 문안에 들이지도 않았다.
가엾어진 딸을 시집문안에 가 자결하도록 설득하고 가마에 태웠다.
그리고 독약그릇을 그 가마에 넣어주고 시집으로 쫓아 보냈다.
서재필의 실부(實夫) 서광효(徐光孝), 그리고 형 재춘(載春), 아우 재우(載雨), 모두 은진(恩津) 옥에 갇혀 있었다.
아버지는 절곡 끝에 '만일 관노(官奴) 사령배(使令輩)가 문전에 오거든 잡혀가서 욕을 당하느니보다는 차라리 자결하라'는 유서를 아내와 며느리에게 남기고 자결하였다.
관노 사령들이 화석리(花石里) 앞길에 나타난 것을 보고,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맞보고 앉아 독약을 마셨다.
시어머니는 숨졌는데 며느리는 못다 죽어 대청 대들보에 목을 매어 죽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서재필은 '이 분통을 어떻게 의롭게 결실 시키겠는가'라고 미치광이처럼 혼잣말을 하며 배회하더라 하였다.
서재필은 어려서부터 키가 남보다 크고 기운이 세어 동네 아이들을 잘 때리기도 하였으나, 남달리 패기와 기상이 흘러넘쳤다.
서재필은 어려서부터 잡다한 지식에 해박했으며 평소 자존심이 강하였다.
1878년(고종 15년) 봄 초시에 합격하고, 1879년 네 살 연상인 경주이 씨(慶州李氏)와 조혼, 1881년(고종 18년) 봄 다시 김영석(金永奭)의 딸 광산 김 씨와 재혼하였다.
18세(1882년) 때 증광 문과에 병과(3등)로 급제하였다.
벼슬에 오르면서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하게 되며, 정신적 지주로 삼았던, 국방력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김옥균의 권유로 1883년 봄 서재필은 14명의 평민 출신 청년들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가, 1884년 1월부터 7개월간 토야마 육군 하사관학교에서 총검술, 제식훈련, 폭탄 투척 등의 신식 군사 훈련을 받았다.
갑신정변의 3일 천하 후, 제물포항에 정박 중이던 일본 선박을 타고 일본으로 피신, 이후 미국으로 망명했다.
미국에서 감리교 신자로 개종하고, 펜실베이니아 사립고를 다녔다.
이후 워싱턴에서 조지워싱턴 대학의 전신인 코크란 단과 대학에서 자연과학과 역사를 배웠고, 프린스턴 신학 대학을 졸업하고, 컬럼비안 대학 재학 중이던 1890년 6월 미국인으로 귀화하여, 6월 10일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받았다.
1892년 컬럼비안 대학교를 재학 중, 가필드 병원(Garfield Hospital에서 1년간의 수련의 인턴 과정을 거쳤다.
1893년 정식 의사면허를 받았다.
1893년 6월 컬럼비안 대학교 의과대학 야간반을 2등으로 졸업하였다.
서재필은 1894년 미국 초대 철도우체국장의 딸인 뮤리엘 메리 암스트롱(Muriel Mary Armstrong)을 만나 그의 과외 가정교사가 되었고, 청혼하여 결혼하였다.
1895년(고종 32년) 3월 1일 법무대신(法務大臣) 서광범(徐光範)의 건의로 작위가 회복되었다.
5월 10일에는 미국 체류 중 외부 협판(外部協辦)에 임명된다.
8월에는 학부대신 서리에 임명되었다.
갑오개혁으로 갑신정변 당시 서재필 등의 급진개화파에게 내려진 역적의 죄명이 벗겨지자 1895년 가을, 미국을 방문 중 워싱턴 시에 들른 박영효를 워싱턴 시 내에서 10년 만에 만나게 되고, 그에게서 조선의 정세를 접하게 된다.
귀국하여, 그는 조선인으로서 관직을 임명받는 것을 거부하는 대신 1896년(고종 33년) 1월 김홍집 내각으로부터 10년 계약으로 총리대신과 같은 액수였던 월봉 300원(연봉 3,600원)을 받는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이런 우대가 가능했던 것은 그가 미국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환율은 원과 달러가 같았으며 미국에서 받는 월급은 100달러였다.
이어 장기체류를 결심하고 우편으로 컬럼비아 대학 의과대학의 세균학 강사직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한편 그는 철저하게 미국인으로 행세하였다.
고종 앞에서 자신을 부를 때에도 외국인 고문관과 같이 '외신'이라고 하였고, 담배를 피우기도 하였다.
1896년 4월 7일 한국 최초의 신문인 《독립신문 (獨立新問)》을 순한글과 영어로 인쇄, 발간하였다.
서재필은 정부로부터 창립 자금 4400원을 지원받아 시작하였다.
독립문은 서재필이 특별히 초빙한 건축사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이 설계하였다.
후일 사적 32호로 지정된 독립문은 서재필이 독립문의 윤곽을 스케치한 것을 바탕으로 독일 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설계를 담당했다.
토목·건축공사는 한국인 건축 기사 심의석이 담당하고 중국인 노무자들이 노역을 맡았다.
공사비는 기부금으로 해결했다.
1898년 12월 10일 최익현이 서재필, 유길준의 사형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날 최익현의 상소를 필두로 1900년까지 거의 연일 서재필과 유길준, 김윤식 등을 사형에 처해야 된다는 상소가 올려졌다.
1900년 윤용선은 그가 을미사변에 개입된 인물이라며 처벌할 것을 청하는 상소까지 올리기도 했다.
2차 미국 망명인 1898년 4월 미국으로 환국, 4월부터 1899년 8월까지 미국-스페인 전쟁에 미국군 군의관으로 잠시 참전하였다.
이때 그는 미군 병원선 하지 호(號)에서 미국 육군 군의관으로 부상병의 진료와 수술을 담당했다.
미국-스페인 전쟁이 끝난 뒤 노동과 상점의 아르바이트로 활동했으나 곧 그만두었다.
바로 필라델피아 대학교 의학부로 돌아가 해부학 강사가 되어 해부학 강좌를 담당했다.
필라델피아 대학의 해부학 강사 직은 1914년까지 출강하였다.
1899년 말부터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위스터 연구소에서 병리학 연구원으로도 근무하였다.
서재필은 휴전을 못 보고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 5일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노리스타운 몽고메리 병원 병실에서 후두암과 방광암, 과로의 합병증으로 일생을 마쳤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향년 88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