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가는 이야기

백정(白丁) 이야기

높은바위 2025. 3. 20. 07:02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백정(白丁)은 군역의 의무를 지지 않는 일반 농민을 의미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 고려시대의 천민 계층인 '화척'을 가리키는 말로 바뀌었다.

화척은 여진·거란족 등 북방 민족의 후예로 유랑생활을 하며 소·돼지를 도살하고, 고리와 가죽신을 만드는 일을 하며 생계를 잇는 사람들이었다.

세종대에 이들을 양인으로 대우해 주고자 백정이라 부르게 했다.

 

백정(白丁)은 여느 사람처럼 말을 타고 장가도 가지 못하였다.

가마를 타고 시집을 가지도 못하였다.

일생일대의 이 영광스러운 날에 말을 못 타고, 가마를 못 타다니... 하고, 몸부림을 쳤으나 관례가 그런 데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들은 신랑은 말 대신 소를 타고 신부는 가마 대신 널빤지에 얹혀, 장가를 가고 시집을 가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덮개 없는 이를 두고 사람들은 「소등 장가, 널빤지 시집」이라 하였다.

당시 백정에 대한 대우로 보아서는 그나마 아량을 베푼 극히 너그러운 대우라고 할 수가 있었다.

 

백정은 장가는 가되 상투를 꽂아서도 안되었다.

큰 머리를 얹어서도 안되었다.

그들에게 결발(結髮)이 허락되는 날은 아들을 낳았을 때였다.

 

백정은 이름을 짓는 데도 제한을 받았다.

인(仁), 예(禮), 의(義) 같은 훌륭한 뜻을 가진 자(字)를 이름에 쓰면 <참월(僭越)>이라 하여, 사형(私刑)을 받게 마련이었다.

이름뿐만 아니라 한때는 성(姓)을 자칭하거나 표시하는 것마저도 금지되었다.

지방에 따라서는 개화기에 들어서도 이러한 풍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상민이 양반들에게 존댓말을 써야 하듯이 백정은 상민에게 깍듯이 경어를 써야만 했다.

늙은 이에게는 <생원님>, 젊은 이에게는 <서방님>, 어린이에게는 <도령님(男)> 또는 <아기씨(女)>라고 존대해서 불러야만 했다.

백정은 가죽신을 신을 수 없었다.

메투리마저도 금지되어 있었다.

이같이 백정은 인간과 짐승 사이의 대우를 받아 왔었다.

 

그러나 그러한 백정에게도 특혜(?)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백정에게는 병역의 의무와 납세의 의무가 없었다.

의무를 지니고 싶어도 나라에서 주지를 않았다.

 

백정은 호적도 없었다.

광무(光武) 3년(1899년), 호적령(戶籍令)이 새로 내려 백정에게도 입적(入籍)의 혜택이 주어지자, 그들은 어떻게나 반가워했던지 순사가 그들이 사는 집단촌으로 민적조사를 나오면, 큰 잔치를 베풀어 그를 환대하였다.

백정들에게 향연을 받았다는 이유로, 독직(瀆職)에 몰려, 순사직에서 쫓겨나 빵장수로 겨우 생계를 이어가던 어떤 일본 순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