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도 안 간 누이동생이 아이를 배자, 김유신은 나라안에 이 불의를 널리 알리고, 나뭇가지 위에 아이 밴 누이동생을 얹혀 불을 질렀다.
만약 이 불길의 연기를 선덕여왕(善德女王)이 빨리 발견하지 못했던들, 김춘추(金春秋)의 연인이던 그의 누이는 분살(焚殺)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당(唐) 나라와의 싸움에서 그의 둘째 아들 패장(敗將) 원술(元述)이 살아 돌아왔다.
후공(後功)을 위해 못 죽고 돌아왔다 하니까, 김유신(金庾信)이 칼을 빼들고 참형(斬刑)하려 했다.
이 역시 왕이 말려 의절(義絶)만 하고, 평생 보질 않았다.
유신이 죽은 후에 원술이 돌아와 어머니를 뵙겠다 하니까, 도리를 못 지킨 자식은 자식이 아니라고 끝내 대면하지 않았다.
김유신이 조선시대 사람이라면 그런 의로움이 훌륭할 것도 없다.
통일신라시대 때만 해도 자연적인 의리나 본능적인 의리가, 규범적이고 고식적인 의리보다 한결 강했다.
그런 시대에 부녀나 부자의 정 위에다가 법도나 국가에의 의리를 올려놓은 김유신은 영웅이었다.
그는 딸을 죽이고 이스라엘의 영웅이 된 에프타나, 딸을 바다에 바치고 트로이에 진군할 수 있었던 희랍의 영웅 아가멤논과 같은 비극적 영웅이었다.
충청북도 진천(鎭川)에는 이 영웅을 모시는 길상사(吉祥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