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시/영국

알프레드 에드워드 하우스먼(Alfred Edward Housman)

높은바위 2023. 1. 27. 08:52

 

내 나이 하나 하고 스물이었을 때                       

                           

내 나이 하나 하고 스물이었을 때

어느 어진 이가 하는 말을 나는 들었다. 

"돈이야 금화이건 은화이건 주어 버릴지라도

네 마음만은 결코 주어서는 안 되고, 

보석이야 진주건 루비건 주어 버릴지라도

네 생각만은 자유 분방해야 하느니라."      

그러나 내 나이 하나 하고 스물이었으니

나에겐 소용없는 말이 되었지.

 

내 나이 하나 하고 스물이었을 때

또 그가 하는 말을 나는 들었다. 

"가슴속으로부터 우러나는 마음은

결코 헛되이 주어지진 않는다. 

그것은 많은 한숨으로 보답되고

끝없는 연민으로 팔리게 된다."     

이제 내 나이 둘 하고 스물이 되니

, 그것은 진실, 참다운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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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I Was One-And-Twenty

                    - Allfred Edward Housman 

 
When I was one-and-twenty

I heard a wise man say,

"Give crowns and pounds and guineas

But not your heart away;

Give pearls away and rubies

But keep your fancy free."

But I was one-and-twenty,

No use to talk to me.




When I was one-and-twenty

I heard him say again,

"The heart out of the bosom

Was never given in vain;

'Tis paid with sighs a-plenty

And sold for endless rue."

And I am two-and-twenty,

And oh, 'tis true, 'tis tr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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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프레드 에드워드 하우스먼(A(lfred) E(dward) Housman : 1859. 3. 26, 잉글랜드 우스터셔 포크베리 ~ 1936. 4. 30, 케임브리지)

절제되고 소박한 문체로 낭만적 염세주의를 표현한 서정시를 써서 유명해졌다.

그는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훨씬 더 좋아했는데, 12번째 생일날에 당한 어머니의 죽음은 어린 그에게 견디기 어려운 충격이었다. 이것은 분명 그의 시가 염세주의를 표현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옥스퍼드대학교 재학시절 자신에게 동성애 욕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더 큰 번민에 사로잡혔다.

하우스먼은 한 건장한 동급생 친구를 열렬히 사랑하게 되었으나 그 청년은 그의 사랑에 보답하지 못했다.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방황한 하우스먼은 그때까지 우등생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옥스퍼드대학교 졸업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1882~92년 런던 특허청에서 서기로 일하면서 저녁이면 대영박물관 열람실에 들러 라틴어 교재를 연구했다. 그는 라틴어에 능통했던 데다가 시인들이 시어를 선택하는 방식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어 라틴어 본문 속의 오류를 바로잡는 데 놀라운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여러 신문·잡지에 기고한 글이 학계의 관심을 끌어, 1892년 런던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의 라틴어 교수로 임명되었다.

자신이 애인 없이 살 운명이라고 체념한 하우스먼은 점점 세상을 등지고 시를 쓰는 데서 위안을 찾았다. 이렇게 쓰기 시작한 시는 〈슈롭셔 젊은이 A Shropshire Lad〉(1896)로 엮어져 나왔는데, 하우스먼의 말에 따르면 이 시들은 하인리히 하이네, 셰익스피어의 시와 스코틀랜드 변경지방의 발라드를 본뜬 것이라고 했다.

그는 각각의 시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명료하게, 그러나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을 찾아냈다. 이와 똑같은 목적으로 그는 실제 자신과는 다른 농사꾼의 시각에서 서정시를 썼으며, 그 첫 번째 시를 쓰기 시작할 때까지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슈롭셔 지방을 무대로 삼았다. 〈슈롭셔 젊은이〉는 서서히 인기를 얻었지만 그 인기는 탄탄한 것이어서, 〈마지막 시 Last Poems〉(1922)가 시집으로서는 놀랄 만한 성공을 거두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하우스먼은 자신의 본분이 라틴어 학자라고 여겨 문단을 멀리했다. 1911년 케임브리지대학교 라틴어 교수가 되어 죽기 직전까지 강단에 섰던 그가 이룬 최대의 학문적 업적은 30년이 넘는 오랜 연구 끝에 내놓은 마닐리오스 주해본(1903~30)이다. 그는 마닐리오스의 시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원문 교정의 여지가 많아 연구대상으로 택했다. 서정시에서 나타난 모질고 직설적인 면은 학술적인 글에도 그대로 이어져, 냉소적 기지로써 상식을 옹호한 그는 많은 사람의 두려움을 샀다.

강의록 〈시의 명칭과 본질 The Name and Nature of Poetry〉(1933)은 하우스먼의 신중한 예술관을 보여주는 책이다. 그의 형제인 로렌스는 그의 시를 골라 유고집 〈알려지지 않은 시 More Poems〉(1936)를 출판했다. 〈서간집 Letters〉은 1971년에 나왔으며, 그의 생애와 작품을 소개한 A. S. F. 가우의 〈A. E. 하우스먼 A. E. Housman〉은 1936년에, 리처드 퍼시벌 그레이브스가 쓴 전기 〈학자 시인 하우스먼 A. E. Housman : The Scholar Poet〉은 1979년에 각각 출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