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현대시 감상

95. 봉황수

높은바위 2005. 7. 18. 06:08
 

95. 봉황수

 

                                               조 지 훈

 

  벌레 먹은 두리기둥1),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2)소리 날아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玉座)위엔 여의주(如意珠) 희롱하는 쌍룡(雙龍) 대신에 두 마리 봉황새를 틀어 올렸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3)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패옥4)소리도 없었다. 품석5) 옆에서 정일품(正一品), 종구품(從九品) 어느 줄에도 나의 몸둘 곳은 바이 없었다.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를 양이면 봉황새야 구천(九天)6)에 호곡하리라.

 

                                             문장 13호. 1940.2.

 

  * ꡔ문장ꡕ에 발표한 이 시는, 일제 압박기의 퇴락한 고궁을 그리고 있는데, 냉철한 역사 의식으로 망국의 슬픔을 표현한 수작이다. 첫번째 문장은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라고 하여 퇴락한 고궁의 모습을 그리고 있으며, 두번째 문장은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사대주의를 비판하는 냉철한 역사 의식으로 옥좌의 모습을 묘사한다. ‘봉황’은 사대주의에 대항하는 민족 정신, 혹은 민족 정기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첫째, 둘째 문장이 퇴락한 고궁의 묘사라면, 셋째 문장부터는 그에 대한 감상을 읊고 있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이라 하여 웅지를 펴보지 못한 민족과 나에 대한 감회를, 넷째 문장에서는 흘러간 역사의 허무 속에서 현재의 자신의 괴로운 처지를 읊고 있다. 마지막 문장에서는 민족이 걸어온 수난사, 망국의 한을 ‘봉황’을 통하여 호소한다.


 

 

1)  두리기둥 : 둥근 기둥.

2) 풍경(風磬) : 절 등의 건물에서 차마 끝에 다는 작은 종.

3) 추석 : 벽돌같이 다듬어진 돌.

4) 패옥 : 금관 조복의 좌우에 늘어 뜨려 차던 옥.

5) 품석 : 대궐 안 정전 앞뜰에 계급의 품계를 새겨 두고 정일품부터 종구품에 이르기까지 두 줄로 세운 돌.

6) 구천 : 가장 높은 하늘. ‘구만리장천’의 준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