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현대시 감상

93. 해

높은바위 2005. 7. 18. 06:04
 

93.

 

                                             박 두 진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어, 달밤이 싫어,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어,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어……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창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라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라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에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애띠고 고운 날을 누려보리라.

 

                         1946. 상아탑

 

* 이 시에 대한 시인 자신의 해설을 보자. “이 시는 8․15 광복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계기에 의해서 마련되었고, 그러한 세기적인 격동과, 극적이고 풍부하고 다단하고 복잡한 배경에 의해 씌어졌다. (중략) …… 이러한 모든 시적 이념과 팽창과 충전과 연소와 그 압도적인 영감의 구상화의 대응을, 나는 저 뜨겁고 영원하고 절대하고 威熱한 우주의 한 중심체인 ‘해’이외의 그 어느 것으로 대신할 수 없었다. 이 ‘해’야말로 가장 으뜸가고 가장 적절 정확하고, 가장 훌륭하고 유일한 이미지의 시적 실체요 그 활력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나의 궁극적인 이상, 민족의 이상, 인류의 이상의 궁극상을 하나의 비원으로서, 하나의 열원으로서 최대한의 보편화, 최대한의 영원화, 최대한의 형상화를 도모해 본 것이다”. (후략)

  윗 글을 참고로 이 시를 보면, 어둠과 광명(해)의 대립적 이미지로 시작된 이 시는 오둠 곧 핍박, 모해, 갈등의 세계(일제 치하의 현실로 볼 수 있음)를 거부하고 다같이 화해한 순수세계(청산)를 열렬하게 소망하고 있다. ‘해, 달밤, 청산, 사슴’ 등 상징의 표현 기법이 두드러진 이 시의 핵심은 ‘해’이다. 이 ‘해’는 조국의 광복일 수도 있고, 영원히 평화로운 이상 세계의 빛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해’의 기독교적 배경 : ‘해’는 성서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사야서 35장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같이 되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되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중략)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豺狼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중략).

  위의 말에는 유토피아적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 숨어 있다. 박두진의 ‘해’는 이와 같은 기독교적 유토피아를 식민지 치하의 어두움과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박두진의 시세계가 기독교적 정신과 긴밀하게 상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 작품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