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현대시 감상

86. 하 관(下 官)

높은바위 2005. 7. 18. 05:53
 

86. 하    관(下  官)

 

                                  박 목 월

 

  관이 내렸다.

  깊은 가슴 안에 밧줄로 달아 내리듯.

  주여, 용납하옵소서.

  머리맡에 성경을 얹어 주고

  나는 옷자락에 흙을 받아

  좌르르 하직했다.


  그 후로

  그를 꿈에서 만났다.

  턱이 긴 얼굴이 나를 돌아보고

  형님!

  불렀다.

  오오냐. 나는 전신(全身)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그는 못 들었으리라.

  이제

  네 음성을

  나만 듣는 여기는 눈과 비가 오는 세상.

  너는

  어디로 갔느냐.

  그 어질고 안쓰럽고 다정한 눈짓을 하고.

  형님!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는데

  내 목소리는 미치지 못하는,

  다만 여기는

  열매가 떨어지면

  툭 하는 소리가 들리는 세상

 

           시집 ‘난․기타’(1959)

 

* 이 시는 아우의 주검을 땅 속에 묻는 형의 지극한 슬픔과 아우를 그리워하는 절실한 심정을 차분한 어조로 표현한 작품이다. 작품 전체는 ‘관이 내리다’, ‘하직하다’, ‘눈’, ‘비가 오다’ 등의 하강적 이미지가 지배하고 있으며, 이는 아우의 죽음과 시적 자아의 내면적 슬픔을 표현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첫째 부분(1-7행)은 아우를 땅에 묻는 모습이다. 아우의 관은 시족 자아의 가슴 깊은 곳에서 밧줄을 달아 내리듯 무겁게 내려진다. 그리고 그는 옷자락에 흙을 받아 쏟음으로써 아우와의 사별을 확인한다. 그러나 시적 자아는 이 과정에서 슬픔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슬픔의 깊이를 더하게 한다.

  둘째 부분(8-14행)은 장례를 마친 후 어느날 꿈 속에 아우를 만나는 것이다. 꿈 속에서 아우는 그를 돌아보고 ‘형님!’하고 부른다. 그는 온몸으로 대답한다. 그러나 이승과 저승의 사이는 너무도 멀어 아우는 내 대답을 듣지 못한다. 아우와의 거리를 실감하는 대목이다.

  셋째 부분(15행 이하)은 간절한 그리움과 적막감을 바탕으로 이승과 저승 사이의 아득한 거리를 노래하고 있다. 아우는 죽어서 저승에 있고, 그는 살아서 이승에 있다. 여기는 눈과 비가 오는 세상이고, 아무리 아우를 불러도 저승까지 소리가 미칠 수 없는 세상이다. 여기서 ‘다만 여기는/열매가 떨어지면/ 툭하는 소리가 들리는 세상’은 애써 억제하는 시적 자아의 슬픔의 깊이를 표현한 대목이다. ‘툭’하는 소리는 아우가 없는 이 세상의 삭막함을 암시하면서 열매로 상징되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허무감을 표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