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현대시 감상

81. 데 생

높은바위 2005. 7. 14. 06:11
 

81. 데   생

 

                                           김 광 균

 

         1

  향료(香料)를 뿌린 듯 곱다란 노을 위에

  전신주 하나하나 기울어지고


  먼 고가선(高架線) 위에 밤이 켜진다.

      

         2

  구름은 보랏빌 색지(色紙) 위에

  마구 칠한 한 다발 장미.


  목장의 깃발도 능금나무도

  부을면 꺼질 듯이 외로운 들길.

                 조선일보. 1939.7.9.


       雪     夜

  어느 먼-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끝에 호롱불 여위어가며

  서글픈 옛 자췬 양 흰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먼-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찬란한 의상을 하고

  흰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1938. 조선일보

 

* 이 시는 김광균의 다른 시들과는 다른 특징을 보인다. 다른 시들이 거의 모두 회화적인 이미지 중심의 현대적 감각의 폭을 지닌 것임에 비해, 이 시는 대상의 이미지화는 물론 서정적 상상력의 형상화에도 성공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시의 운율을 제거하고 공간적 리듬, 사물의 이미지화에 주력한 것이 김광균의 시들인데, 「설야」는 원관념 ‘눈’을 그리운 소식, 서글픈 옛 자취, 여인의 옷 벗는 소리, 추억의 조각 등 비유적으로 전이하여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정취를 물씬 풍긴다. 그리하여 평면적 상상력의 이미지 세계가 전체적으로는 설야의 추억과 애상을 읊은 서정시의 면모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