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현대시 감상

4.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높은바위 2005. 6. 2. 05:53

4.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조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나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어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1926. 개벽



* 이 시는 시인이 『백조』동인 시절에 쓴 ‘나의 침실로’류와는 달리 퇴폐적․감상적 낭만성을 극복하고 망국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에 대응하는 저항성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1-3연에는 주권을 상실한 동토에도 찾아오는 봄의 정경이 몽환적으로 그려져 있고, 4-6연에는 봄을 맞아 나아가는 힘찬 모습이, 7-9연에는 부활 의지가 노동 의지로 드러나 있으며, 마지막 10연에서는 빼앗긴 들에서 위태롭게 살아가는 위기 의식과 함께 민족혼만은 쉬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토로하고 있다.

  이 시는 주권과 국토를 빼앗긴 비참한 식민지 현실에서도 살아 있음을 탁월하게 형상화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