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현대시 감상

5. 님의 침묵

높은바위 2005. 6. 2. 05:54
 

5. 님의 침묵

                   한  용  운(1879-1944)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다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어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 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1926년. 시집 ꡔ님의 침묵ꡕ



* 이 시는 연 구분이 없이 사설조의 산문체로 되어 있다. 여성 화자의 경어체의 사용, 우리말의 유려한 구사, 고도의 상징적 수법, 불교적 사상의 심화 등은 이 시를 뛰어난 서정시로 만드는데 총체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또한 이 시의 ‘역설적 구조’는 밝음과 어둠, 슬픔과 희망, 헤어집과 만남은 하나라는 역설적 진리를 보여줌으로써 상징성을 더한다.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않았다’는 역설적 의지의 표현으로 시상의 깊이를 더해주는 결정적 요인이 되는 것이다. 또한 이 시는 ‘이별-이별 후의 슬픔-희망으로의 전이-만남’이라는 극적 구성 방식을 취하고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더욱 묘미를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