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현대시 감상

2. 불놀이

높은바위 2005. 5. 31. 06:13
 

  2.불놀이

                  주 요 한(1900-1979)


  아아 날이 저문다, 서편 하늘에, 외로운 강물 우에, 스러져 가는 분홍빛 놀 …… 아아 해가 저물면 해가 저물면,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 우는 밤이 또 오건마는, 오늘은 사월이라 파일날 큰 길을 물밀어가는 사람 소리는 듣기만 하여도 흥성시러운 것을 왜 나만 혼자 가슴에 눈물을 참을 수 없는고?


  아아 춤을 춘다, 춤을 춘다, 시뻘건 불덩이가, 춤을 춘다. 잠잠한 성문 우에서 나려다보니, 물냄새 모랫냄새, 밤을 깨물고 하늘을 깨무는 횃불이 그래도 무엇이 부족하야 제 몸까지 물고 뜯을 때, 혼자서 어두운 가슴 품은 젊은 사람은 과거의 퍼런 꿈을 강물 우에 내어던지나, 무정한 물결이 그 그림자를 멈출 리가 있으랴? ----- 아아, 꺾어서 시들지 않는 꽃도 없건마는, 가신 님 생각에 살아도 죽은 이 마음이야, 에라 모르겠다, 저 불길로 이 가슴 태와버릴까, 이 설움 살라버릴까 어제도 아 픈 발 끌면서 무덤에 가 보았더니 겨울에는 말랐던 꽃이 어느덧 피었더라마는 사랑의 봄은 또 다시 안 돌아오는가, 차라리 속 시원히 오늘 밤 이 물 속에 …… 그러면 행여나 불쌍히 여겨줄 이나 있을까 …… 할 적에 퉁, 탕, 불꽃을 날리면서 튀어나는 매화포, 펄떡 정신을 차리니 우구구 떠드는 구경꾼의 소리가 저를 비웃는 듯, 아아 좀더 강렬한 정열에 살고 싶다, 저기 저 횃불처럼 엉기는 연기, 숨맥히는 불꽃의 고통 속에서라도 뜨거운 삶을 살고 싶다고 뜻밖에 가슴 두근거리는 것은 나의 마음 ……


  사월달 다스한 바람이 강을 넘으면, 청류벽 모란봉 높은 언덕 우에, 허어옇게 흐늑이는 사람떼, 바람이 와서 불 적마다 불빛에 물든 물결이 미친 웃음을 웃으니, 겁 많은 물고기는 모래 밑에 들어백이고, 물결치는 뱃숡에는 졸음 오는 리듬의 형상이 오락가락 --- 어른거리는 그림자. 일어나는 웃음소리, 달아논 등불 밑에서 목청껏 길게 빼는 어린 기생의 웃음소리, 뜻밖에 정욕을 이끄는 불구경도 이제는 겹고, 한 잔 한 잔 또 한 잔 끝없는 술도 이제는 싫어, 지저분한 배 밑창에 맥없이 누으면 까닭 모르는 눈물은 눈을 데우며, 간단없는 장고소리에 겨운 남자들은 때때로 불 이는 욕심에 못 견디어 번득이는 눈으로 뱃가에 뛰어나가면, 뒤에 남은 죽어가는 촛불은 우그러진 치마 깃 우에 조을 때, 뜻 있는 듯이 찌걱거리는 배젓개 소리는 더욱 가슴을 누른다 ……


  아아 강물이 웃는다, 웃는다, 괴상한 웃음이다, 차디찬 강물이 껌껌한 하늘을 보고 웃는 웃음이다. 아아 배가 올라온다, 배가 오른다, 바람이 불 적마다 슬프게 슬프게 삐것거리는 배가 오른다 ……


  저어라 배를, 멀리서 잠자는 능라도까지, 물살 빠른 대동강을 저어 오르라. 거기 너의 애인이 맨발로 서서 기다리는 언덕으로 곧추 너의 뱃머리를 돌리라. 물결 끝에서 일어나는 추운 바람도 무엇이리오, 괴이한 웃음소리도 무엇이리오, 사랑 잃은 청년의 어두운 가슴 속도 너에게야 무엇이리오, 그림자 없이는 밝음도 있을 수 없는 것을, ------ 오오 다만 네 확실한 오늘을 놓치지 말라, 오오 사로라, 사로라! 오늘 밤! 너의 발간 횃불을, 발간 입설을, 눈동자를, 또한 너의 발간 눈물을 ……

                           1919. 창조



* 처음부터 끝까지 거침없이 흐르는 격정적 어조와 직설적이고 감상적인 문체가 자유 분방한 리듬을 형성하여 재래시의 정형성을 과감히 벗어나, 근대 시가 문학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것으로 평가되는 시가 이 ‘불놀이’이다. 대담한 상징적 표현, 내면 의식의 표출, 순수한 우리말의 사용, 계몽 의식 배제 등의 미의식에 주목할 만하다.

  임을 잃은 슬픔과 그 극복의 과정이 삶과 죽음, 밝음과 어둠, 기쁨과 슬픔, 고뇌와 飛翔같은 관념적 심상을 자아내는 ‘물’과 ‘불’의 대립적 심상으로 나타나고, 이것이 다시 ‘배’를 축으로 하여 통합되는 과정으로 현산화됨으로써 상징적 효과가 극대화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