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시/중국

소식(蘇軾)

높은바위 2015. 8. 19. 08:13

 

              숙해회사(宿海會寺)  해회사(海會寺)에서 묵으며

 

籃輿三日山中行(남여삼일산중행)              남여 타고 삼일 동안 산속을 다녔다니,

山中信美少曠平(산중신미소광평)              산속은 정말로 아름다우나 평평한 곳이 드물어.

下投黃泉上靑冥(하투황천상청명)              아래로 황천에 던져지고 위로 하늘에 던져지며,

線路每與猿狖爭(선노매여노원쟁)              몇 번이고 원숭이와 길을 다투었도다.

 

重樓束縛遭澗坑(중누속박조간갱)              높은 누각에 답답하게 있다 골짜기를 만난지라,

兩股酸哀飢腸鳴(양고산애기장명)              두 다리는 시큰시큰 주린 배는 쪼르륵쪼르륵.

北渡飛橋踏彭鏗(배도비교답팽갱)              높은 다리를 삐걱삐걱 밟아 북쪽으로 건너가니,

繚垣百步如古城(요원백보여고성)              백 보나 되는 담장이 오래된 성곽과 같도다.

 

大鍾橫撞千指迎(대종횡당천지영)              큰 종을 치니 백사람의 천 손가락이 맞아주고,

高堂延客夜不扁(고당연객야부경)              고당에선 손님을 맞느라 밤에도 빗장 걸지 않았구나.

杉槽漆斛江河傾(삼조칠곡강하경)              사목에 옻칠한 욕조에는 강물을 담아서,

本來無垢洗更輕(본내무구세경경)              본래도 없던 때 씻으니 더욱 가뿐하네.

 

倒牀鼻息四鄰驚(도상비식사린경)              침상에 눕자 코고는 소리가 사방을 놀라게 하고,

紞如五鼓天未明(담여오고천미명)              오경의 북소리 둥둥 울려도 날은 아직 안 밝았네.

木魚呼粥亮且淸(목어호죽량차청)              아침 죽을 먹어라 부르는 목어소리 밝고 맑게 울리자,

不聞人聲聞履聲(부문인성문리성)              사람소리는 들리지 않고 신발소리만 들리네.

 

 

 

* 소식(蘇軾)은 오랜 벼슬살이에서, 1079년에는 황주(호북성)으로 유배를 갔지만 낙천적인 성격으로 6년간의 유배 생활을 무사히 끝냈다.

이후 승진을 거듭하여 한림학사의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1094년 다시 신법당이 득세하면서 혜주(광동성)으로 유배되었고, 3년 후인 1097년 중국 최남단인 해남도까지 귀양을 갔다.

당시 해남도는 주민 대부분이 소수민족인 여족으로 이루어진 미개척 섬이었고, 소동파는 셋째아들 소과만을 데리고 갔다.

해남도에서도 소동파(蘇東坡)는 뛰어난 적응력을 발휘해 주민들의 인망을 얻었고, 중앙의 명을 받고 살던 집에서 쫓겨났을 때에도 해남도 사람들의 도움으로 오두막을 지어 살 수 있었다.

이후 신법당을 지지했던 철종이 죽고 복권되었으나, 귀양길에서 돌아오는 도중 남경에서 6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2번 결혼하여 슬하에 네 아들을 두었다.

 

소동파(蘇東坡)는 기본적으로 유교사상에 뿌리를 둔 현실참여주의자로서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구제해야 한다는 지식인으로서의 사명감이 매우 투철했다.

게다가 그는 워낙 다정다감한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백성에 대한 연민의 정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친구에 대한 인간적 애정과 관심도 유난히 깊었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 불교사상과 도교사상에서 비롯된 현실도피적 사고방식도 동시에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물질세계의 허무성과 무가치성을 간파하고 물질세계 바깥에서 노닐려는 초월적 인생관도 지니고 있었으며, 그 결과로 자연을 매우 사랑했고 나아가 그 자신이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의 일부가 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이처럼 세속적인 가치에 대하여 초연할 수 있었기에 그는 온갖 정치적 핍박 속에서 자신의 출중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해 보기는커녕 일생의 대부분을 유배 생활과 지방관 생활로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긍정적인 태도로 삶에 임할 수 있었다.

 

소동파(蘇東坡)의 시는 송(宋)나라 때부터 중국은 물론, 고려나 요(遼)나라 같은 이웃 나라에까지도 널리 알려져 있었던 만큼 독자의 수요에 부응하여 그의 시집 역시 송나라 때부터 시작하여 줄곧 간행되어 왔으며, 이 가운데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도 아주 많다.

 

소동파(蘇東坡 : 1036-1101)가 우리 문단에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했다.

그러기에 이규보(李奎報 : 1168-1241)는 “세상의 학자들이 처음에는 과거시험에 필요한 문체를 익히느라 풍월을 일삼을 겨를이 없다가 과거에 급제하고 나서 시 짓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면, 소동파 시 읽기를 무척이나 좋아하기 때문에 매년 과거의 방이 나붙은 뒤에 사람마다 금년에 또 서른 명의 소동파가 나왔다고 여긴다”라고 했고, 김종직(金宗直 : 1431-1492)은 “신라 말에서 고려 초까지는 오로지 만당(晩唐) 시만 익혔고, 고려 중엽에는 오로지 소동파 시만 배웠다”라고 했다.

김부식(金富軾 : 1075-1151)과 동생 김부철(金富轍)의 이름이 소동파(본명 軾)와 소철(蘇轍) 형제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은 소동파에 대한 우리 문인들의 추앙심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하겠다.

이렇듯 우리의 선조들은 소동파 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여가가 날 때마다 소동파는 틈틈이 돼지고기를 쪄서 먹곤 했다고 전해진다.

요리를 하던 중에 오랜 친구가 그를 방문해서 바둑을 두곤 했다.

소동파는 바둑에 열중해서 타는 냄새가 나도록 고기를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이렇게 내 놓은 것이 바로 동파육(東坡肉)이라고 하여, 거지닭(叫花鷄)과 함께 항저우의 유명한 음식이 되었다.

 

오늘날까지 동양에서 이어지는 족보의 원형은, 소순(蘇洵 : 아버지) · 소식(蘇軾) · 소철(蘇轍 : 아우)이 정리한 보첩에서 비롯하였다.

 

Sailing / Rod Stewa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