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시/중국

주돈이(周敦頤)

높은바위 2023. 2. 2. 08:12

 

          애련설(愛蓮說)

 

수륙에 자라나는 풀과 나무의 꽃에는 사랑할 만한 것이 매우 많다.

진나라의 도연명은 유독 국화를 사랑하였고

당나라 이래로 세상 사람들은 모란을 매우 사랑했다.

 

나는 오직 연꽃을 사랑하노니 연꽃은 진흙에서 나오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맑은 잔물결에 깨끗이 씻기어도 요염하지 않으며

줄기 속은 비어있으나 겉은 곧아서 덩굴이나 가지를 뻗어내지도 않는다.

 

향기는 멀리 갈수록 더욱 맑으니 우뚝 깨끗하게 서 있어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으나 가까이서 무례히 희롱할 수 없으며 가지고 놀 수도 없구나.

 

내가 이르기를, 국화는 꽃 가운데 초야에 묻혀 은거하는 자요,

모란은, 꽃 중 가운데 부귀한 자이며 

연꽃은 꽃 중의 군자와 같다.

 

! 국화에 대한 사랑은 도연명 이후로 들은 적이 드물고,

연꽃에 대한 사랑이 나와 같은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모란을 사랑하는 사람은 당연히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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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陸草木之花, 可愛者甚蕃 (수륙초목지화, 가애자심번)

晋陶淵明獨愛菊 (진도연명독애국)

自李唐來, 世人甚愛牧丹 (자이당래, 세인심애목단)

予獨愛蓮之出於泥而不染 (여독애연지출어이이불염)

濯淸漣而不妖 (탁청련이불요)

中通外直, 不蔓不枝, (중통외직, 불만부지)

香遠益淸, 亭亭淨植 (향원익청, 정정정식)

可遠觀而不可褻玩焉 (가원관이불가설완언)

予謂, ", 花之隱逸者也 (여위, ", 화지은일자야)

牧丹, 花之富貴者也 (목단, 화지부귀자야)

, 花之君子者也" (, 화지군자자야.")

! 菊之愛, 陶後鮮有聞 (! 국지애, 도후선유문)

蓮之愛, 同予者何人? (연지애, 동여자하인?)

牡丹之愛, 宜乎衆矣 (모란지애, 의호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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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에게 올리는 최고의 찬사'라고 할 만한 문학작품. 주돈이가 말년에 여산에서 지내면서 지은 산문이다.

구성은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뉜다.

전반부에선 연꽃의 고결함을 이야기하고, 후반부에서는 연꽃과 국화, 모란을 서로 비교하여 모란은 부유한 자, 국화는 현명한 자, 연꽃은 군자로 평가했다.

진흙에서 자라고도 깨끗한 연꽃의 모습을 군자의 고고함에 빗대었으며 국화와 연꽃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는 데서 현자나 군자가 별로 없음을 아쉬워하였다.

송 대의 대표적인 한문학으로 후대에도 널리 읽혔다.

우리나라 창덕궁 후원의 애련지(愛蓮池)와 애련정(愛蓮亭) 또한 주돈이의 애련설에서 따온 명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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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돈이(周敦頤 : 1017년 ~ 1073년)는 북송의 관리이자 유학자이자 문학가로, 자는 무숙(茂叔)이고 호는 염계(濂溪), 시호는 원(元)이다.

본래 이름은 돈실(敦實)이었으나 송나라 영종의 초명에 실(實)이 들어가서 피휘 때문에 돈이(敦頤)로 이름을 바꾸었다.

유교 사상가로서 존대하여 주자(周子)라고도 불렸는데,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朱熹, 1130~1200)를 가리키는 주자(朱子)와 혼동되므로 일반적으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도주(道州) 영도현(營道縣) 출신이다.

지사 벼슬을 하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8살 때 어머니와 함께 용도각 대학사였던 외삼촌 정향(鄭向)의 집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자랐다.

1037년 외삼촌이 양절전운사(兩浙轉運使)로 임명되자 다시 모친과 함께 윤주(潤州)의 단도현(丹徒縣)으로 옮겨 살았다.

1036년에는 정향에게 추천받아 20세 젊은 나이에 홍주(洪州) 분녕현(分寧縣)의 주부를 거쳐 푸젠성(福建省) 남안(南安)의 사법관(사리참군)을 맡았다.



여기서 관리로 있을 적에 정향(程珦)이라는 사람이 부임했는데, 정향은 주돈이의 인품과 학문에 경의를 표함과 동시에 그의 두 아들인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를 주돈이에게 나아가 배우게 했다.

그 후에는 각 도의 지사를 역임했으며, 만년에는 지남강군(知南康軍)으로 임명되어 장시성의 성자현(星子縣)에 머무르다가 여산(廬山)의 연화봉(蓮花峰) 아래에 집을 짓고 은거했다.

이곳에 은거하며 집 근처의 개울을 염계(濂溪)라 이름 붙이고 자신을 '염계선생'이라 칭했기에 후에 염계가 그의 호가 되었다.

이때 모친의 무덤도 여산으로 옮겨왔는데, 1073년 57세 나이에 병으로 죽은 뒤 모친의 무덤 곁에 묻혔다.



도가와 불교의 주요 인식과 개념을 수용하여 성리학의 전신이자 또 다른 이름인 도학(道學)을 창시하고 우주의 원리와 인성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새로운 유교이론을 개척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태극도설》과《통서》가 있으며, 이는 후에 후학들이《주자전서》라는 제목으로 한 데 엮어 내었다.

문학작품으로는 군자의 덕을 연꽃에 빗대어 표현한 〈애련설(愛蓮說)〉이 전하는데, 중국의 한문학을 대표하는 글로 평가받는다.



그의 방계 후손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총리였던 저우언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