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흙 속은 차갑고, 네 위에는 깊은 눈이 쌓여 있다.
저 먼 곳 쓸쓸한 무덤 속에 차갑게 묻힌 그대
하나 뿐인 사람아, 모든 것을 삼키는 시간의 물결로
떼어져 나는 사랑을 잊고 만 것일까?
홀로 남게 된 내 생각은
산봉우리들을 날고, 앙고라의 기슭을 방황한다.
지금 날개 접고 쉬는 곳은 히드풀과 양치기잎이
네 고고한 마음을 항시 덮고 있는 근방이다.
흙 속은 차가운데 열 다섯 차례의 어두운 섣달이
이 갈색 언덕에서 어느새 봄날의 물이 되었다.
변모와 고뇌의 세월을 겪어 왔으나
아직 잊지 못할 마음은 너를 배반하지 않았다.
젊은 날의 그리운 사람아, 혹시 세파에 시달려
너를 잊었다면 용서하기 바란다.
거센 욕망과 어두운 소망이 나를 괴롭히나
그 소망은 너 생각하는 마음을 해치지는 않았다.
너 말고 달리 내 하늘에 빛나는 태양은 없었다.
나를 비추는 별도 역시 달리 없었다.
내 생애의 행복은 모두 네 생명에서 비롯되었고
그 행복은 너와 함께 무덤에 깊이 묻혀 있다.
그러나 황금의 꿈꾸던 나날은 사라지고
절망조차 힘이 빠져 파괴력을 잃었을 때
나는 알게 되었다. 기쁨의 도움이 없이는
생명을 이루고 강해지고 키울 수 없다는 사실을.
그때 나는 정열의 눈물을 억제하고
네 영혼을 사모하는 내 어린 영혼을 일깨워
나와는 관계 없는 무덤에
서둘러 가려 하는 열망을 호되게 물리쳤다.
때문에 지금 내 영혼을 시들게 하려 하지 않고
추억의 달콤한 아픔에 잠기려 하지 않는다.
깨끗한 고뇌의 잔을 모두 마신 지금에
왜 다시 헛된 세계의 일을 추구하리오.
* 소설 <폭풍의 언덕>의 작자인 에밀리 브론테(Emily Jane Bronte : 1818-1848)는 무척 격정적이고 정열적인 시인이었다.
그녀의 시 <추억>은 음침한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있어, 영어로 씌어진 서정시의 한 정점을 이루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브론테의 세 자매(나이 순으로 샤롯트, 에밀리, 앤)는 서로 협력하여 자비로 한 권의 시집을 출판하였다.
그런데 그 작자는 세 명의 남자 이름으로 된 것이었기 때문에, 그 아무도 천재적인 이 세 자매가 간행한 시집이라는 사실을 안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 시집은 1년 동안에 단 2권밖에 팔리지 않았고, 대부분은 폐기되어 손가방 뒤에 대는 휴지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브론테의 집 사람들은 한 명도 예외없이 일찍 요절하는데, 에밀리도 결핵에 걸려 30세의 나이로 죽는다.
언니인 샤롯트에 의하면 "에밀리는 남자보다 강했고, 어린이보다 단순했다"고 한다.
그녀는 병상에 누워 왕진을 받을 때도 반드시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단정히 입고 의사를 맞이했다고 한다.
불타는 듯한 열정이 있는 한편, 이런 금욕적인 결벽성의 갈등이 있음으로 해서 <추억>과 같은 시가 창작되었을 것이다.
에밀리 자매들의 시집은 태평양에 가공의 섬을 설정하고, 그 섬을 무대로 한 일종의 전설을 그려낸 것이다.
때문에 <추억>속에 있는 "하나뿐인 사람"이란 것은 환상 속에 타오른 정열의 덩어리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15년 전에 연인이 죽어 헤어져야만 했던 여성으로서의 연인에 대한 거센 그리움의 정은 이상스러울 정도로 현실감이 넘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