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좋은 밤 속으로 순순히 들어가지 말라
그 좋은 밤 속으로 순순히 들어가지 말라
늙은 나이는 날 저물 때 열내고 몸부림쳐야 한다.
빛의 소멸에 분노, 또 분노하라.
똑똑한 이들은 끝장에 이르러서야 어둠이 마땅하다 알지만,
자기네 말로써 번개를 가르지 못한 까닭에,
그 좋은 밤 속으로 온순히 가지 않는다.
착한 이들은 마지막 파도가 지난 후
자기네의 연약한 행적이 푸른 포구에서 얼마나 빛나게 춤추었을지 억울해 울면서,
빛의 소멸에 분노, 또 분노하라
달아나는 해를 붙잡고 노래한 사나운 이들은,
섭섭히 해를 보내준 걸 뒤늦게 알고
그 좋은 밤 속으로 순순히 들어가지 말라
죽음이 가까운 심각한 이들은
눈멀게 하는 시각으로, 멀은 눈도 유성처럼 불타고 명랑할 수 있음을 깨닫고,
빛의 소멸에 분노, 또 분노하라
그리고 당신 내 아버지, 그 슬픈 높이에서
이제 제발 맹렬한 눈물로 나를 저주, 축복하십시오
그 좋은 밤 속으로 순순히 들어가지 말라.
빛의 소멸에 분노, 또 분노하라
* * * * * * * * * * * * * * *
* 시인의 아버지 David John Thomas의 죽음을 앞두고 쓴 시이다.
관습적인 시에서는 죽음을 고요히 받아들이기를 기원하지만 이 시는 죽음에 대항해서 ‘격노하라’(rage)고 외친다.
시인은 그 이유를 모든 사람들(wise men, good men, wild men, grave men)을 통해 일일이 찾아낸다.
시의 형식은 2개의 각운(여기서는 /-ait/와 /-ei/)만으로 19행을 이끌어 가는 villanelle이라는 매우 어려운 방식인데, 격한 감정에 직면해서 의도적으로 힘든 작업을 함으로써 정신적 균형을 잃지 않으려는 태도로 해석된다.
* * * * * * * * * * * * * * *
* 딜런 말레이스 토머스(Dylan Marlais Thomas, 1914년 10월 27일 ~1953년 11월 9일)는 영국 웨일스의 시인이자, 산문 작가이다.
2016년 10월 13일 노벨문학상을 받게 된, 포크 가수 밥 딜런 <1941년 5월 24일(82세)>이 그의 시를 좋아하여, 자신의 예명을 이 시인의 이름에서 따왔다.
딜런 말레이스 토머스는 평생을 술과 함께 보내 결국 술로 세상을 떠났다.
딜런 말레이스 토머스는 웨일스의 시인, 산문 작가로, 그의 작품은 풍부한 희극성, 랩소디풍의 경쾌하고 활발한 운율, 비애감으로 유명하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우리나라에는 변변한 세계문학전집 하나 제대로 번역된 것이 없었던 만큼, 지금의 성장하고 있는 세대는 그런 점에서 좀 더 풍족해지고 그런 만큼 오히려 더 문학과 멀어지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최근에 와서야 일어판 중역본이 아니라 우리 학자들이 원본을 놓고 번역하여 나오는 작품집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역시 딜런 토마스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자료가 없다.
우리에게 딜런 토마스는 포크 록 음악의 밥 딜런이 그의 시를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자신의 이름에 딜런 토마스의 이름을 따왔다는 정도로 알려져 있을 뿐, 그의 신산한 삶이랄까, 영국에서도 신비로운 분위기의 아름다움이 넘쳐난다는 웨일스 출신의 한 시인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극히 드물다.
인터넷상으로도 그에 대한 자료를 구하기는 참 어렵다.
그의 사생활, 특히 죽음을 몰고 온 그의 무모한 음주는 사람들의 구설수에 올랐다.
웨일스 남서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스완지 그래머 스쿨에서 영어를 가르쳤으며, 토머스도 이 학교에 다녔다.
어머니는 농부의 딸이었기 때문에 휴일이면 시골의 외가에 갈 수 있었다.
'양치식물이 자라는 언덕 : fern hill(1946)'이라는 시는 그 기쁨을 묘사하고 있다.
교지를 편집하고 거기에 시와 산문을 기고했지만, 언제나 자신과 직접 관계가 없는 과목은 공부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에 학교성적이 나빴다.
그러나 영시에 관해서는 실제적인 지식을 풍부하게 갖고 있었다.
아주 어린 나이에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학자들에 따르면 그가 지은 시의 상당 부분은 21세 때 런던으로 이주할 무렵 이미 적어도 초보적인 형태로나마 완성되었다.
16세 때 학교를 그만두고 <사우스웨일스 이브닝 포스트>지 기자로 일했다.
처녀시집 <18편의 시 : 18 poems>(1936), <사랑의 지도 : The map of love>(1939)에서 더욱 발전했다.
토머스의 작품은 노골적으로 감정적 충격을 주고 소리와 운율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원시주의를 추구하고, 성서적인 내용과 성적인 표현 사이에 긴장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 영문학에서 유행하던 엄격한 사회비평의 경향보다는 웨일스의 전통에서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
여기에 바로 그의 작품의 독창성이 있다.
1939년까지의 시들은 내성적이고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으며 성적, 종교적 감정의 흐름과 관련되어 있다.
여기서 토마스는 성과 죽음, 죄와 구원, 자연의 발전과정, 창조와 소멸이라는 주체들에 관하여 자기 자신을 수사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1936년경부터 주로 런던에서 생활했고, 1937년 아일랜드 태생의 케이틀린 맥나마라와 결혼하여 아들 2명과 딸 1명을 낳았다.
그는 이미 문단에서 유명해지고 사교성도 있었지만, 아내와 늘어나는 자식들을 부양해야 했기 때문에 늘 궁핍했다.
영국 방송협회 BBC에서 일하고 영화대본도 쓰면서 돈을 벌려고 노력했지만 충분한 보수를 받을 수 없었다.
폐병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복무를 면제받고 영화대본을 썼으나, 소득세 신고를 뒤늦게 하는 바람에 가까스로 번 돈 마저 영국 재무부에 원천적으로 다 빼앗기고 말았다.
이때 그는 더욱 폭주하기 시작하여 부유한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기 시작한다.
그의 창작 속도는 더욱 느려지고 더욱 힘들어지고 있었으나 시는 계속 썼다.
<죽음과 입구 : Deaths and Entrances>(1946)에 실린 시들은 예전보다 더 명쾌한 정신을 보여주며, 토마스가 종교적인 시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이 시집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충격과 더불어 그가 웨일스의 자연환경과 더 깊은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음유시인의 어조를 잃지 않았고, 시인에게 성직자에 가까운 고귀한 역할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 무렵 런던에 거주하고 있던 그의 건강은 극도로 악화되고, 집요한 세무서의 추적과 건강의 악화로 인해 미국행을 결심하게 된다.
그는 미국 전역을 방황하며 일명 <황금 같은> 베이스라는, 자신의 목소리로 시를 읊으며, 방랑시인의 후예답게 피곤한 미국여행을 강행하고 폭음을 일삼았다.
그의 개인적인 절망감은 깊어졌고, 결혼 생활도 위험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웨일스로부터 멀리 떨어진 뉴욕에서 폭음으로 죽고 만다.
그의 시는 난해하고, 몽환적이다.
미국 포크 음악의 대명사인 밥 딜런은 그를 존경한 나머지 자신의 성(性)을 딜런이라고 지었다.
딜런 토마스는 이미 현대가 시작된 무렵의 시인이었지만, 당대의 시인들과는 다르게 방랑시인으로 살았다.
불과 20세의 나이로 첫 시집을 내고, 단번에 영국 문단에 경악과 찬탄을 자아낸 천재로 군림했지만, 불과 39세의 나이로 알코올 중독과 방랑의 피로로 요절하고 말았다.
그는 일평생 웨일스의 자연과 몽롱한 몽환의 세계를 방랑하며 살았다.
그는 그 무렵 자신의 지위를 신중하게 지키며 평온한 생애를 보냈던 많은 신사적 시인들과는 다르게 '시인은 성직자에 가까운 고귀한 역할을 해내야 한다'는 믿음으로 치열하게 살았다.
그의 시는 점잔을 떨지 않는다.
그의 시에는 철학이나 과학, 신학보다 섹스, 출생, 성장, 쇠퇴, 자연현상, 죽음과 같은 인간의 체취가 물씬 흐른다.
그는 창조와 파괴를 거듭하는 예술가의 숙명 속에 살았고, 그 숙명 속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