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은 한 해의 시작인 음력 1월 1일을 일컫는 말로, 한 해의 최초 명절이라는 의미도 있고, 대보름까지 이어지는 민족 최대의 명절이었다.
설날이라는 말과 같은 우리나라의 명절이다.
원일(元日)·원단(元旦)·원정(元正)·원신(元新)·원조(元朝)·정조(正朝)·세수(歲首)·세초(歲初)·연두(年頭)·연수(年首)·연시(年始)라고도 하는데 이는 한 해의 첫날임을 뜻하는 말이다.
또한 신일(愼日)·달도(怛忉)라고도 하는데, 이 말은 근신하고 조심하는 날이라는 뜻이다.
이밖에 설을 양력 1월 1일 신정(新正)의 상대적 개념으로 구정(舊正)이라고도 하는데 이 말에는 설을 폄하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삼국시대 문헌에서부터 설 명절에 대한 기록이 보이며, 의례, 민간신앙, 복식과 음식, 놀이 등 설 명절 관련 세시풍속 또한 풍성했다.
신성한 날이라는 신앙적 의미가 컸지만 오늘날은 조상에 차례를 지내는 것만 남았고, 세시풍속 또한 사라져 가고 있는 실정이다.
설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7세기에 나온 중국의 역사서에서 볼 수 있다.
『수서(隋書)』와『당서(唐書)』의 신라에 대한 기록은 왕권국가다운 설날의 면모를 잘 드러내고 있다.
즉 “매년 정월 원단(元旦)에 서로 경하하며, 왕이 연희를 베풀고 여러 손님과 관원들이 모인다.
이 날 일월신(日月神)을 배례한다”는 기록은 국가 형태의 설날 관습이 분명하게 보이는 내용이다.
우리 문헌에도 설명절의 연원과 관련된 기록이 보인다.
『삼국유사(三國遺事)』권1, 기이(紀異) 사금갑(射琴匣)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라 21대 비처왕[(소지왕이라고도 한다)] 때 궁중에서 궁주(宮主)와 중의 간통사건이 있어 이들을 쏘아 죽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후 해마다 상해(上亥)·상자(上子)·상오(上午)일에는 만사를 꺼려 근신하였다 하여 달도(怛忉)라 했다.
달도는 설의 이칭이기도 하므로 설의 유래로 볼 수도 있다.
또한 상해·상자·상오일은 정초 십이지일(十二支日)에 해당되는 날로 이때의 금기를 비롯한 풍속은 오늘날까지 그 잔재가 남아 있다.
『고려사』에는 고려 9대 속절(俗節, 명절)로 원단(元旦, 정월 초하루 설날), 상원(上元, 정월 대보름), 상사(上巳, 후에 삼짇날이 됨), 한식(寒食), 단오(端午), 추석( 秋夕), 중구(重九), 팔관(八關), 동지(冬至)가 소개되어 있다.
조선시대는 원단·한식·단오·추석을 4대 명절이라 했지만 그렇다고 다른 명절이 약화된 것은 아니다.
민간에서는 오히려 전 시대보다 세시명절과 그 무렵에 행하는 세시풍속이 다양했다.
설날을 비롯하여 각 세시명절에 행해지는 세시풍속은 대체로 소망을 기원하는 의례적인 성격을 지닌다.
기원의 대상은 신(神)과 같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만 무언가 '초월적인 힘'이 되기도 한다.
세시풍속은 농사를 중심축에 놓고 행해지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농경의례라고도 한다.
대부분의 세시풍속이 풍농의 기원과 예측, 풍흉을 점치는 점세(占歲), 농공과 풍농을 감사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후대에 이르러 어업과도 관련을 갖게 된다.
그러나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바뀌면서 농사가 약화되어 농경의례로서의 성격도 희박해졌다.
설날 아침에는 조상에게 차례를 지낸다.
차례는 종손이 중심이 되어 지내는데 4대조까지 모시고 5대조 이상은 시제 때 산소에서 모신다.
차례를 마치고 가까운 집안끼리 모여 성묘를 하는데 근래에는 설을 전후하여 성묘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