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가는 이야기

백호(白湖) 임제(林悌)의 무어별(無語別)

높은바위 2025. 1. 21. 06:56

 

조선 선조 때의 호남가단의 시인 가운데 백미(白眉)로 치는 임제(林悌, 1549년 음력 11월 20일 ~ 1587년 음력 8월 11일)의 이야기이다.

많은 일화를 남긴 일대의 문재(文才)요, 기재(奇才)인 백호(白湖) 임제(林悌=예조정랑·湖堂호당)다.

그는 박상(朴祥), 임억령(林億齡), 임형수(林亨秀), 김인후(金麟厚), 양응정(梁應鼎), 박순(朴淳), 최경창(崔慶昌), 백광훈(白光勳), 고경명(髙敬命) 등 호남파(湖南派) 시인 가운데 백미(白眉)로 친다.

 

十五越溪女 / 십오월계녀 / 열다섯 아리따운 아가씨

羞人無語別 / 수인무어별 / 남부끄러워 말도 못하고 헤어졌네

歸來掩重門 / 귀래엄중문 / 돌아와 겹문을 꼭꼭 닫아걸고는

泣向梨花月 / 읍향이화월 / 배꽃 같은 달을 향하여 흐느끼네.

 

이 유명한 "무어별(無語別)"은 5언 절구 한시로서, 한국 시가상(詩歌上) 극치로 평가받고 있으며, 서정성으로는 고려 정지상의 "송인"과 함께 투톱으로 꼽히는 명시이다.

제목 "무어별(無語別)"은 '말 못하고 헤어지다'라는 뜻인데, "규원(閨怨, 규수의 원망)"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어 이것을 제목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다.

 

임제는 어려서부터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스승 없이 지내다 20세가 지나 성운을 스승으로 모셨다.

송순에게도 사사했으며, 1577년 알성시에 1등으로 급제해 벼슬길에 나섰다.

흥양현감, 서북도 병마평사, 예조정랑을 지냈으나, 당쟁의 현실에 관직에 뜻을 잃고, 전국을 유람하다 고향 회진리에서 39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송순의 회방연에서 가마를 멘 4인 중 한 명이며, 그가 명기 진랑(眞娘=黃眞伊황진이)이라는 이단적 명기의 소문을 듣고, 송도에 갔더니 그 여인은 이미 죽고 없었다.

그녀의 무덤을 찾아가 시조를 읊고, 글을 지어 제전(祭奠)을 드렸던 사실은 그의 낭만적 반체제의 한 표현이기도 하다. 

 

그는 우리 조선의 자주독립을 부르짖은 드물게 보는 주체주의자이기도 하다.

그의 시에서도 그런 정을 느끼는 대목이 있고, 그의 마지막 말은 우리나라가 중국의 속국 됨을 한탄하는 말이었다.

아들네들이 둘러앉아 비통해 우는데 그는,

"사해(四海)의 그 많은 나라들에 제(帝)라 칭하지 못한 것이 유독 우리나라뿐이란 말이냐.

이런 나라에 산다는 것은 차라리 죽는 것만 못하니 서러워할 것이 없다."라고 달래고, 

평생 몸에 익힌 다음과 같은 익살로 그의 일생을 마친 것이다.

"내가 五(오)대 六(육)조를 살기만한다면 천자의 윤번이 돌아오련만......"

그의 나이 그때 39세였다.

 

그가 평소 패용했던 검과 퉁소는 나주 백호문학관에 소장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