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시/미국

도로시 파커(Dorothy Parker)

높은바위 2023. 10. 21. 07:39

 

경험

 

어떤 남자는 네 가슴을 둘로 찢어 놓고,

어떤 남자는 네가 우쭐하도록 치켜세우고,

어떤 남자는 너를 쳐다보지도 않았지;

하지만 그게 다 문제를 해결해 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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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파커(Dorothy Parker, 1893년 8월 22일 - 1967년 6월 7일 향년 73세)는 미국의 시인, 단편 작가, 평론가, 풍자 작가였다.

파커는 문제가 많은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후, 더 뉴요커 등의 매체에서 문학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였으며 알곤퀸 라운드 테이블을 설립 멤버 중 한 명이 되었다.

알곤퀸 라운드 테이블이 해체된 후 할리우드에 입성하고 영화 각본 집필을 추구하였다.

아카데미상 후보가 된 작품 2편을 포함하여, 할리우드에서의 성공은 좌익 정치에 관여했다고 하여 할리우드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20세기 초에 등단한 미국 작가들 가운데는 도로시 파커(Dorothy Parker)란 여성이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그녀는 1920년대에 주로 “배니티 페어”(Vanity Fair)란 잡지를 통해 문단에 등장해서 수많은 시와 단편소설을 남겼다.

그녀는 뛰어난 재치와 촌철 살인 격인 유머를 갖고 뉴욕 문학계에 여왕과 같이 군림했다.

 

도로시 파커는 원래 도로시 로스차일드란 이름으로 태어났는데 이름이 보여주듯이 아버지는 유태계였고, 어머니는 스코틀랜드 출신이었다.

그녀는 뉴저지 주 웨스트엔드란 도시에서 출생했다.

어머니는 5살 때 사망했으며 어머니의 죽음은 그녀의 마음에 큰 상처를 주었다.

그 후 아버지는 의류 업으로 조금 돈을 벌은 후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여인과 재혼했다.

어린 도로시는 이에 몹시 못마땅했지만 결국의 수녀원에서 경영하는 천주교 학교에서 교육을 마친 후 뉴욕으로 갔다.

그러나 어렸던 시절에 대한 인상이나 기억이 별로 좋지 않았는지 그녀는 당시의 이야기를 작품에서 거의 거론하지 않았다.

뉴욕에 정착한 다음 그녀는 낮에는 습작을 하고 밤이 되면 돈을 벌기 위해 무용학교에 가서 피아노 반주를 쳤다.

그녀가 젊은 시절에 아르바이트를 한 이유는 아버지의 의류 사업이 망해버렸기 때문이었다.

 

1917년에서 1920년까지 그녀는 “배니티 페어”에 가끔씩 시나 평론을 기고했다.

이 잡지사에는 당시 비평가로 이름을 날리던 로버트 벤츨리가 고정 칼럼을 갖고 있었다.

마침 그가 휴가를 가는 통에 도로시는 임시로 이 잡지사에 고용되어 벤츨리의 칼럼을 메우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를 연유로 인해 재기 발랄한 그녀의 실력이 인정되어서 후에 정신 직원으로 채용되었다.

이곳에는 로버트 벤츨리와 함께 로버트 셔우드란 작가가 사원으로 활약했다. 이들은 뉴욕 44가에 있는 알곤퀸 호텔에서 매일 점심을 나누는 문단과 연예계 거물 7-8명으로 구성된 소위 “알곤퀸 라운드 테이블”을 주도하고 있었다.

도로시 로스차일드도 이 그룹에 참가했는데 그녀는 유일한 여성 멤버가 되었다.

그 당시 멤버들은 점심시간에 모여 식사를 하면서 그저 잡담이나 하고 정보는 나누는 정도가 아니었다.

헌법 개정으로 인해 금주법이 전국적으로 시행된 당시 그들은 밀주를 마시는데 큰 비중을 두었다.

그래서 도로시는 자연히 술꾼들의 무리에 자연스럽게 합류한 셈이다.



1917년 에드윈 폰드 파커라는 채권 중개인과 결혼해서 이름이 도로시 파커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은 알코올에 찌든 생활의 연속이었고, 그로 인해 갈등과 고통이 따랐다.

남편이 1차 대전이 발발하여 참전하기 위해 유럽으로 떠난 후, 홀로 후방에 남은 그녀는 화려한 남성 편력을 시작했다.

전쟁이 끝나자 그들의 결혼도 이혼으로 끝장을 보았다.

스코트 핏제럴드가 소위 “재즈 시대”라고 명명한 당시 미국, 특히 동부에서는 상류 사람들은 서로 어울려 파티를 벌이고, 금지된 술을 마시며 재즈에 맞춰 춤을 추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녀는 수많은 파티에 나타나서 마치 주인공이나 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명성이 높아감에 따라 매일 파티마다 돌아가며 참석해 술을 마시고 남자들과 사귀면서 인생을 즐겼지만, 그녀의 마음속 깊이에는 항상 고독과 슬픔 그리고 절망감이 숨어 있었다.

 

그녀가 쓴 이런 짧은 시가 있다.

“술에 취하고 춤추고 웃으면서 거짓말을 늘어트려 놓고/ 밤에 돌아가며 사랑을 한다./ 내일이면 우리 모두 죽을 운명이니까!/ (아, 그러나, 우리는 결코 죽지 않는다.)-The Flaw in Paganism (전문)

이 시에서 (아, 그러나, 우리는 결코 죽지 않는다.)라는 구절은 퇴폐적인 면이 있으면서도 그녀의 불꽃같은 시상을 보여주고 있다.

다행히 다음 날 살아 있어서 그렇지 만일 죽었다면 무엇을 보고 느낄 수 있겠는가?

 

                                   - (참고) 정유석 님의 "Dorothy Parker, 등단과 작품세계"

 

도로시 파커는 30대에 들어선 1920년대에 많은 혼외정사를 했고, 실연당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중 가장 열렬했던 연애는 작가 찰스 맥아더와의 관계였다.

임신이 되자 마음에 없는 낙태 수술을 한 후 자살을 시도했었다.

다음 해인 1925년에도 또 한 번의 자살 소동이 있었다.

그녀는 자기주장이 아주 강한 성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에게 의존하는 성향이 심해서 자기를 실제로는 사랑하지 않는다거나 자신의 명성을 이용하여 출세하려는 속된 남자들의 뻔한 의도를 눈치채고도 자주 사랑에 빠져 들어갔다.



그런 점을 자신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는지 '새로운 사랑' (The New Love)이란 시에서는 자신이 선택하기보다는 상대방에 자신을 맡김으로써 사랑의 희열보다는 쓸쓸함과 적막감을 느끼게 한다.

“햇살이 비치거나 비가 오거나 나는 개의치 않고 관심 없어요./ 창가에 떨어지는 빗방울 같이 나날은 스치고 지나가지요./ 문가에 한 남자가 서 있고 내 머리에는 그가 준 꽃이 꽂혀있지만/ 내 안색이 창백하고 슬픔을 띄우고 있다면 아직도 그는 나를 아픔답게 보려 나요?/ 나는 아무런 생각이나 말이 없이 자리에 앉아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지요./ 그가 방밖으로 나가려고 문을 찾을 것인지 또는 내 집에 머물 것인지 상관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전문)



당시 여자들이 느끼는 수동성을 '여자 다음이란' (On Being a Woman) 시에서 또 이렇게 표현했다.

“내가 로마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항상 집을 그리워했으나/ 그러나, 고향에 있을 때에는 내 마음 이탈리아를 보고 싶어 죽을 지경이지요./ 그리고 어째서 내 사랑, 내 주인이 같이 있으면 / 나는 지루해 죽을 지경이지요./ 그러나 당신이 자리를 일어나 떠날 때에는--그때는/ 당신에게 내게 돌아오라고 소리치고 싶어 져요.” (전문)



1930년대에 들어 그녀는 10년 연하의 두 번째 남편 캠블과 결혼한 후 할리우드로 이주했다.

거기서 그녀는 ‘스타 탄생’ (Star is Born, 1937)의 각본을 맡아서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했다.(이 영화는 주디 갤런드가 1954년에 주연한 같은 이름의 영화와는 다른 작품이다.)



캠블은 그녀를 사랑했지만, 그의 존재는 그녀의 강력한 성격과 지나친 재능에 가려졌다.

그들 사이에는 경제적 문제, 두 사람의 알코올 중독, 그리고 그의 동성애로 인해 여러 번 시련을 맞았다.

그들은 1947년에 이혼했다가 1950년에 재혼했다.

그러나 3년 후에 다시 별거를 했고 1956년에 재결합했다.

그들은 캠블이 수면제 다량복용으로 자살했던 1963년까지 같이 지냈다.

그녀는 일찍부터 파시즘과 나치즘에 대해 반대했고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 선언했다.

그래서 그녀는 FBI에 의해 조사를 받았고 나중에 매카시 선풍이 불 때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젊어서 화려한 생활을 영위하고 많은 남성의 구애를 받았지만, 말년인 1967년 뉴욕의 한 호텔 방에서 심장마비로 외롭게 사망했다.

시신은 사망한 지 이틀 째 화장되었다.

그리고 남은 재산은 당시 민권운동에 이바지하던 마틴 루터 킹 목사에게 남겼다.



생전에 그녀는 자신의 작품들에 대해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산물이라고 혹독하게 평가했다.

“선배 시인인 에드나 빈센트 밀레이 양과 같은 정교한 발자국을 따르고 싶었어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녀를 내 흉측한 운동화로 마구 짓밟으며 따른 셈이지.”

또 “나는 다만 어린 유태인 소녀가 남들에게 조금 더 아름답게 보이고 싶었던 거야.”라고도 했다.



그녀는 사회에 만연한 허구와 자신의 절제되지 않은 욕구를 독특한 방법으로 기록해 두었다.

그런 점에서 그녀는 20세기에 가장 섬세하고 우아했던 풍자 작가들 중의 하나로 자리를 잡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녀가 장편소설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가벼운 작가로 치부할 수 있으나, 미국 근대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코 그녀에 대한 이해를 빼놓을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