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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톰슨(Francis Thompson)

천국의 사냥개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습니다. 밤과 낮의 비탈길 아래로;나는 그에게서 도망쳤습니다, 세월의 아치 저 아래로;나는 그에게서 도망쳤습니다. 내 마음의 미로로; 그리고 눈물의 안갯속에그를 피해 숨었습니다, 그러고 흐르는 웃음의 시냇물 속에.조망이 활짝 트인 희망의 가로수 길로 달려 올라갔습니다.그러다가 밀침을 받아 거대한 공포의 심연 속으로쏜살같이 거꾸로 떨어졌습니다,쫓고, 또 쫓아오는 저 힘찬 발을 피해.그러나 서두르지 않은 추적으로,침착한 보조로,유유한 속도로, 위엄 있는 긴박성으로,그 발소리 울렸습니다 - 그리고 발보다더 급한 한 목소리 울렸습니다 -"네가 나를 배반하기 때문에, 만물이 너를 배반하느니라." 나는 도망자처럼 애걸했습니다.빠알간 커튼 드리워진, 사랑들이 격자무늬 창살처럼 짜인,..

마뜩하게

어떤 조건에 잘 어울리게. 알맞게.  북간도 서간도 의병들이그곳 동포들의 피맺힌 곡식이나 거덜낸다고혀를 차며 마뜩하게 여기지 않았던 바이번의 제안에 이르렀다 (고은, '황진 만리', "백두산· 3", p. 23)  마땅하오마땅하오, 마땅하다고나무는 마뜩하게 꽃을 터치고운애서린 가지 끝에 꽃은 또져서 (조예린, '빗물', "바보당신", p. 85)

권위주의에의 고려적(高麗的) 저항

근대 서양정치사에서 로 표현되는 정치의 권위주의를 배격하는 한 사조가 있었다.한국의 행정은 강자인 치자(治者)가 약자인 피치자에 군림하여 권력과 권위에 의한 강압성을 치리(治理)의 원천으로 삼아왔다.한국이도(吏道)와 관계(官階)의 엄한 법도는 이와 같은 치리(治理)로 해석이 된다.모든 제도가 관리의 권위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강력히 편성되었고, 한국정치 발달사는 그 권위보장이 보다 많이 보장되는 과정의 표현이었다.민주주의 정치사상도 이 같은 권위주의 사상에의 저항이라고도 볼 수 있다.그리고 한국의 정치적 고질, 그리고 치자와 피치자의 상관관계의 부정적 가치의 모든 나쁜 요소도 이에서 비롯되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한데 이따금 이 권위주의 정치에 개별적인 저항을 했던 정치가를 발견할 수가 있고, 그 같은..

포르티아 넬슨(Portia Nelson)

다섯 연으로 된 짧은 자서전 제1장나는 길을 걷는다.보도에 깊은 구멍이 뚫려 있다.나는 빠진다.길을 잃었어... 나는 속수무책이다.내 잘못이 아니야.빠져나갈 길을 찾는 데는 평생이 걸린다.제2장나는 같은 길을 걷는다.보도에 깊은 구멍이 뚫려 있다.나는 못 본 척한다.나는 또 넘어진다.같은 장소에 있다니 믿을 수가 없어.하지만 그건 내 잘못이 아니야.나가려면 아직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제3장나는 같은 길을 걷는다.보도에 깊은 구멍이 뚫려 있다.나는 그것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안다.나는 아직도... 에 속아 넘어간다. 그것은 습관이다.나 눈 뜨고 있어.나는 내가 어디 있는지 안다.그것은 내 잘못이다.나는 즉시 나간다.제4장나는 같은 길을 걷는다.보도에 깊은 구멍이 뚫려 있다.나는 그 주위를 걸어 다닌다.제..

다박머리

다보록하게 난 머리털.  소꼽장하는울 애기 다박머리무지개 아롱아롱비단 무늬 어리느니 (허영자, '스미랑 함께', "어여쁨이야 어찌 꽃뿐이랴", p. 91)  陽地(양지)쪽 소먹이는 코흘리는 다박머리李侍中(이시중) 元師(원사)도 저랬을 것 생각하면때묻고 헐벗었다고 수히 볼 줄 있으랴. (최남선, '關北記俗관북기속', "육당최남선전집· 5", p. 570)

오자미

"내가 어릴 때는 오자미를 갖고 노는 놀이를 많이 하였다.""운동회 때 바구니 터뜨리기에 써야 하니까 한 사람 앞에 두 개씩 오자미를 만들어오도록 하세요." '오자미'는 '콩이나 모래를 넣어 만든 손바닥만 한 헝겊이나 구멍 난 양말을 사용해서, 사방을 둘러 꿰매 어린이 주먹만 하게 만들어서 던지면서 노는 놀이도구'이다.  '오재미'는 비표준어이다. '오자미'는 국어대사전에도 우리말처럼 등록되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순우리말로 알고 있으나, 원래 콩이나 모래를 집어넣은 ‘놀이주머니’를 가리키는 일본말 ‘おじゃみ’다. 그리고 이 오자미를 가지고 노는 놀이를 '오테다마〔お手玉〕'라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의 가난한 아이들이 시작한 놀이라고 한다.

다산 정약용(丁若鏞) 이야기

신유박해 때 동복형 정약종(丁若鍾, 조선의 실학자이자, 가톨릭의 복자, 1760~1801)의 순교와 더불어, 또 다른 이복형 정약현(丁若鉉, 1751~1821)은 신지도(薪智島)에, 동복형 정약전(丁若銓=兵曹佐郞병조좌랑, 1758~1816)은 흑산도(黑山島)에,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강진(康津)에 유배되었다. 「여(與)함이여 마치 겨울에 냇물을 건너듯이, 유(猶)함이여 마치 너희 이웃을 두려워하듯이」라는 《도덕경(道德經)》의 글귀를 따라 '여유당(與猶堂)이라 호를 삼기도 한 정약용은, 경세치용(經世致用)의 대강 속에 그의 학문을 재구성한 유형원(柳馨遠), 이익(李瀷) 이래의 실학자였고, 또 그의 실학을 실천했던 정치가이기도 했다.곡산(谷山) 부사 때 유지와 겨를 써서, 얼음을 얼구어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