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현대시 감상

157. 벼

높은바위 2005. 8. 1. 06:16
 

157.   벼

 

                     이 성 부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와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넓은 사랑,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묻은 그리움,

  이 넉넉한 힘……

 

                     1973. 문학과 지성

 

  * 이 시는 벼의 다양한 형상을 통해 민중적 삶의 모습을 형상화한 시로 유추에 의한 표현 방식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즉 벼라는 생명 표상을 통해서 수천년 동안 눈물과 땀, 피가 배어 온 이 땅에서 민족적 삶의 뿌리와 역사의 저력으로서 전개되어 온 민중의 한과 그 공동체 의식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 벼는 개체로서의 민중의 삶, 또는 생명 의지로 표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