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현대시 감상

121. 풀

높은바위 2005. 7. 23. 08:50
 

121.

 

                                              김 수 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1968.  현대문학

 

* 이 시는 하찮은 존재에 불과한 ‘풀’이 거센 ‘바람’ 앞에서 눕고 울다가 마침내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웃는다는 단순한 내용을 통해, ‘풀의 끈질긴 생명력’을 예찬한 작품이다.

  내면적으로 뽀면, 이 시는 ‘풀’과 ‘바람’만을 노래한 것이 아니다. ‘풀’과 ‘바람’은 무언가 상징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풀’은 세상에서 가장 흔한 것이지만, 목숨 가진 것들 중에서 가장 질긴 생명력을 지닌 것이다. 이와 같은 속성으로 해서 풀으, ‘세상에 무수히 많이 있으면서도 어떤 시련에도 견디어 내는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존재’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이 시에서 ‘바람’은 ‘풀’의 생명력을 억눌는 어떤 힘이다. 그 억누름은 처음에는 쉽게 성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바람’이 불 때마다 ‘풀’은 눕고 또 울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람’은 끝내 ‘풀’의 생명력을 완전히 억누르거나 없애지 못한다. ‘풀’은 ‘바람’이 지나가면 곧 일어나고 ‘바람’이 부는 순간에도 스스로의 삶을 지키고자 싸우며 일어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풀’과 ‘바람’의 싸움은 이 세상에 무수히 존재하는 굳센 생명들과 그것을 일시적으로 억누르고 괴롭히는 힘과의 싸움을 표상한다. 이와 같은 일반적 의미는 오랜 역사를 통해 억세고 질긴 삶을 지켜 온 민중들과 그들을 일시적으로 억압하는 사회 제세력과의 관계를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역사 속에서 끊임없는 시련을 받으며 살아온 민중이 결국은 그들을 억누르는 일시적 강제력을 이겨내는 생명력의 원천임을 노래한 것으로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