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시/중국

이하(李賀)

높은바위 2015. 8. 4. 09:17

 

                        추래(秋來)  가을이 오니

 

桐風驚心壯士苦(동풍경심장사고)           오동에 부는 바람 사람을 놀라게 하여 장사도 괴로운데,

衰燈絡緯啼寒素(쇠등락위제한소)           희미한 등잔 불빛휘장을 두르고 여치1) 차가운 베를 짜듯 울어댄다.

 

誰看靑簡一編書(수간청간일편서)           그 누가 대쪽으로 엮은 이 시집을 읽어주어,

不遣花蟲粉空蠹(불견화충분공두)           책벌레가2) 좀먹어 가루가3) 되지 않게 할까?

 

思牽今夜腸應直(사견금야장응직)           온갖 생각에 오늘밤 창자가 곧추서고,

雨冷香魂吊書客(우랭향혼적서객)           비 내려 차가운 이 곳, 어여쁜 넋4) 책 지은 나를5) 조상한다.

 

秋墳鬼唱鮑家詩(추분귀창포가시)           가을 내 무덤 속에서, 내 넋은 포조의 시를6) 읊으며,

恨血千年土中碧(한혈천년토중벽)           한 맺힌 내 피는 흙무덤7) 속에서 천년을 푸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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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낙위(絡緯) : 가을에 우는 소리가 실을 잣는 것과 같아서 지어진 이름으로 베짱이 또는 여치를 말함.

 

2) 花蟲(화충) : 책을 쏠아 썩게 하는 좀 벌레를 말하는데 몸에 은백색의 가는 비늘이 있어서 두어(蠹魚)라고도 함.

 

3) 분(紛) : 좀 벌레가 쏠아 남게 된 죽간의 썩어서 조각이 난 가루를 말함.

 

4) 향혼(香魂) : 옛 시인의 혼을 말함.

 

5) 서객(書客) : 죽간에 문장을 쓴 시인 자신을 말함.

 

6) 포가시(鮑家詩) : 남조 송나라의 시인 포조(鮑照)를 말함.

 

7) 벽(碧) : 푸른 옥돌을 말하는데 '장자(莊子)'에 주(周)나라 "장홍이 촉땅에서 피살된 후에 피를 묻었더니 삼 년 뒤에 피가 푸른 옥으로 변하였다(萇弘死于蜀, 其血化爲碧)"고 함.

 

 

 

* 이하(李賀)의 시에는 귀신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 시에서는 자기가 귀신이 되어, 땅 속에 누워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스물일곱 꽃다운 나이로 요절했지만, 생전에 이미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었던 사람인가?

짧은 생을 살다간 시인답게, 그는 육칠십년을 살다간 시인이 일생동안 고뇌한 양을 27년에 몰아서 고뇌하다 가버린 사람처럼 작품에 우수(憂愁)와 정열(情熱)이 듬뿍 담겨있다.

 

그는 24세에 백발이 되고, 몸이 파리했으며, 눈썹이 짙은 결핵 체질이라 불우했으며,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했다.

그리하여 타고난 글재주는, 신화와도 같은 환상의 세계만이 잠시나마 정신적 위안을 주었을 것이다.

죽음, 귀신, 눈물, 곡성 등의 용어를 즐겨 구사하여, 작품 전체가 음산하고도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의 작품이 전반적으로 기괴한 분위기에, 환상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하(李賀)는 후세에 240여 수를 남겼는데, 그의 시를 살펴보면, 간혹 기쁨이나 희망 등을 노래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비애의식(悲哀意識)이 일관되게 흐른다.

이 비애의식은 그의 시의 가장 대표적인 풍격의 하나인 비개(悲慨)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특히 이하(李賀)의 시에 나타나는 비애의식은 다양한 상징체계를 거쳐 형상화되면서, 상징주의 시인으로 평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사상적 경향은 염세적 색채가 짙으며, 그 특출한 재능과 초자연적 제재(題材)를 애용하는 데 대해, 후에 ‘귀재(鬼才)’라는 명칭이 붙었다.

그대는 바람 - 손현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