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시/중국

이하(李賀)

높은바위 2015. 8. 3. 10:06

 

 

                     신현곡(神絃曲)  귀신을 위한 노래

 

西山日沒東山昏(서산일몰동산혼)            서산에 해가 지고 동산에 어둠이 깔리면,

旋風吹馬馬踏雲(선풍취마마답운)            회오리바람이 귀신이 탄 말에 불어 말이 구름을 밟고 내려온다.

 

畵絃素管聲淺繁(화현소관성천번)            그림 속 비파소리, 피리소리 얕게 뒤섞이고,

花裙綷綵步秋塵(화군최채보추진)            무당의 꽃무늬 치마 가을 먼지 일으킨다.

 

桂葉刷風桂墜子(계엽쇄풍계추자)            계수나무 잎 바람에 쓸리고 열매는 떨어지는데,

靑狸哭血寒狐死(청리곡혈한호사)            푸른 살쾡이 피를 토하며 울고 한기에 떨던 여우는 고꾸라지누나.

 

古壁彩虯金貼尾(고벽채규금첨미)            낡은 벽에 그려진 용은 꼬리에 금박을 두르고,

雨工騎入秋潭水(우공기입추담수)            비의 신령은1) 말을 타고 가을 연못물에 들어간다.

 

百年老鴞成木魅(백년노효성목매)            백 년 묵은 올빼미는 나무 도깨비 되니,

笑聲碧火巢中起(소성벽화소중기)            웃음소리 함께 파아란 귀화(鬼火)가 둥지에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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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공(雨工) : 비의 신령.

 

 

 

* 이하(李賀)는 ‘귀재절(鬼才絶)’이라고도 불렸다.

실제로 그의 시에는 죽음, 귀신, 눈물, 곡성 등등 귀신의 이미지를 환기하는 시어들이 유난히 자주 등장하거니와, 시상(詩想)도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게 많았다.

그 만큼 죽음이나 귀신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는 증거이겠지만, 기질이 매우 염세적인 탓도 컸던 것 같다.

운도 없었다.

몰락한 당 황실의 후예로 17세 때 대문장가 한유(韓愈)를 만나 시재를 인정받은 후, 그의 권유로 진사시(進士試)에 응시하여 합격했으나, 부친의 이름 진숙(晉肅)의 진(晉)과 진(進)이 같은 음이므로 휘(諱)를 범하는 불효를 저질렀다는 얼토당토않은 비난에 시달리기도 했다.

당시 한유가 그런 비난을 준엄하게 질타하는 명문장 ‘휘변(諱辯)’을 써서 이하를 감싸준 이야기는 유명하다.

한유는 ‘휘변’에서 “...父名晉肅(부명진숙, 아버지의 이름이 진숙이라 하여) 子不得擧進士(자불득거진사, 아들이 진사가 될 수 없다면) 若父名仁(약부명인, 만일 아버지의 이름이 ‘인(仁)’인 경우에는) 子不得爲人乎(자불득위인호, 아들은 사람이 될 수도 없단 말인가?)”라고 꾸짖었었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봉례랑(奉禮郞)이라는 미관말직을 얻어 2년 남짓 지냈으나 그나마 건강이 좋지 않아 사직한 후, 불우한 나날 속에서 염세적이고 몽환적인 시나 쓰면서 울분과 비애를 달래야만 했다.

 

이하(李賀)는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고 귀신을 벗 삼았던 것 같다.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신현곡(神絃曲)’을 보면 흡사 귀신들을 직접 목격하면서 쓴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분위기가 마냥 음산하지만은 않다.

무섭거나 혐오스럽지도 않다.

비파와 피리 소리의 뒤섞임 속에서(청각적 이미지), 꽃무늬 비단치마의 펄럭이게 하고(시각적 이미지), 꼬리에 금박 두른 용까지 등장시킴으로써 현란하고도 역동적인 한 폭의 ‘귀신도(鬼神圖)’를 그려내고 있음을 본다.

백년 늙은 올빼미 둥지 한가운데서 웃음소리 푸른 불이 치솟는다는 대목에서는 괴기한 공감각적 이미지의 극치를 보는 듯하다.

이후 많은 시인들이 이하(李賀)의 ‘신현곡’을 흉내 내 ‘귀신의 노래’를 지었지만 이하(李賀)를 뛰어넘지는 못했다.

 

자(字)가 장길(長吉)이어서 ‘이장길’이라고도 불리는 이하(李賀)는 27세로 숨을 거두면서 “옥황상제의 부름을 받아 백옥루에 상량문을 지으러 간다”는 말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 만큼 죽음에 대한 많은 사유(思惟)와 통찰(洞察)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바, 이승과 저승 사이에 서서 삶과 죽음을 노래했다는 평가가 근거 없는 헛소리는 아닌 듯싶다.

 

그가 그의 벗 진상에게 주는 시 ‘증진상(贈陳商)’에서,

“장안에 한 남자 있어 나이 이십에 몸과 마음이 푹 썩어버렸네(長安有男兒 二十心已朽)

능가경이 책상 앞에 쌓이고 초사가 팔꿈치를 끌어당기네(楞伽堆案前 楚辭繫肘後)

사는 게 곤궁하고 쓸모없어서 해 지면 술잔이나 기울이네(人生有窮拙 日暮聊飮酒)

지금 길이 막혔거늘 어찌 백발이 될 때까지 기다리랴(只今道已塞 何必須白首)....”라고 읊었던 것도 스스로의 죽음을 예고한 것으로 보인다.

 

모두들 꺼려하고 혐오하는 죽음과 귀신까지도 아름답게 미화하여, 시의 소재로 끌어올린 이하(李賀)야말로 말 그대로 ‘귀재절’이었던 것 같다.

Joha skugge - If Wishes Were Hors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