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시/중국

왕발(王勃)

높은바위 2015. 6. 8. 09:30

 

 

             산방(山房)의 밤

 

抱琴開野室(포금개야실)           거문고를 안고 방문을 열어놓고

携酒對情人(휴주대정인)           술잔을 잡고 정인(情人)을 대한다.

林塘花月下(임당화월하)           숲 속의 못가, 달밤의 꽃 아래

別似一家春(별사일가춘)           또 다른 하나의 봄나라.

 

 

 

* 왕발은 <구당서(舊唐書)><왕발전>에 의하면, “6세에 글을 지을 줄 알았고, 글의 구상은 막히는 법이 없고, 글에 대한 정감도 아주 빼어나서, 형들과 글 짓는 재주가 비슷했기에, 부친의 친구 두이간(杜易簡)이 항상 이에 대해 ‘이것은 왕씨 집안의 보배로운 세 그루 나무(王氏三珠樹)’라고 칭찬했다”

 

그의 나이 14살 때 우상(右相) 유상도(劉祥道)가 관내(關內)로 순시를 왔을 때, 그의 기특한 재주를 보고 그를 조정에 추천했다.

그리하여 664년에 천자가 임시로 주재한 대책(對策)시험에 합격하여 조산랑(朝散郞)이란 직책을 받았다.

 

668년, 당시 패왕(沛王) 현(賢)이 그의 명성을 듣고 왕부(王府)의 수찬(修撰)을 시켰다.

그리하여 몇몇 글을 올렸고, 또한 <평대초략(平臺鈔略)>10편을 완성하여, 비단 50필을 받았다.

 

그러나 인생은 항상 평탄하게만 흘러가지 않는 모양이다.

이것이 운명의 장난인지, 아니면 ‘운명은 성격’이란 말이 맞는 것인지 모르지만, 옛글에 따르면 총명한 사람은 항상 경박한 허물이 있기에, 덕을 쌓고 독서를 통하여 이를 보충해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모두들 가슴깊이 새겨야 할 듯하다.

 

칼끝, 붓끝, 입끝, 손끝, 발끝 등등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특히 옛날 봉건시대에서는 조심해야 할 것이 어디 하나 둘이겠는가?

꼭 붓끝 때문 만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어쨌든 그의 운명을 돌려놓은 일이 한꺼번에 터져버린다.

 

당시 황족들은 투계(鬪鷄)를 즐겼는데, 왕발이 이를 가지고 <격영왕계문(檄英王鷄文)>을 지었다가 고종(高宗)의 미움을 받고 왕부에서 쫓겨난다.

그리하여 호북성 강한(江漢)지방으로 유람을 떠나서 사천성 촉땅을 떠돌게 된다.

이런 와중에 그는 괵주(虢州: 지금의 하남성 영보현(靈寶縣) 남쪽)에 약초가 많다는 말을 듣고 곧 괵주참군이 되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재주를 믿고 오만했기에 동료들의 미움을 받았다.

이점을 가볍게 보아 넘겨버리기가 쉽지만 인간으로써 가장 중요한 일인지 모른다.

‘독불장군(獨不將軍)’이라 하지 않았던가?

어쨌든 그가 괵주의 참군으로 있을 때, 죽을 죄를 저지른 관노(官奴) 조달(曹達)을 숨겨 주었다가 일이 누설될 것을 두려워 한 나머지 관노를 죽여 버렸다.

 

그는 결국 죽을 죄를 얻게 되었고, 뒤에 요행이 사면되었지만 관계에서 제명되었다.

이 일로 인하여 그의 부친 왕복치(王福畤) 또한 옹주(雍州: 지금의 섬서성 중부와 감숙성 동북부)의 사공참군(司功參軍)에서 교지(交趾: 지금의 월남 북부)의 령(令)으로 좌천 당한다.

 

명망 있던 한 집안의 보배였으며 가문의 자랑이었던 한 젊은이가 한 순간에 가문에 먹칠을 하고 불효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이왕에 엎질러진 물, 누구를 탓할 것인가?

모든 것이 자신으로 인해 비롯된 일이 아니겠는가?

 

하여튼 이 무렵 그는 그의 일생 중 가장 많은 창작활동을 하였는데, 조부 왕통의 <속서(續書)>16권에 빠진 부분을 보충하여 25권을 완성하였고, <당가천세력(唐家千歲曆)>, <합론(合論)>10편, <백리창언(百里昌言)>18편 등을 찬술했다.

 

김연덕 / 계면조 산조 진양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