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때 청(淸, 만주족이 지배했던 중국의 왕조, 1616~1912) 나라로 인질로 잡혀간 소현세자(昭顯世子, 인조의 맏아들, 1612~1645)에게 정을 쏟았던, 한 명나라 사족(士族)의 젊은 여인이 있었다.
이름은 굴씨(屈氏)로만 알려졌다.
세자가 연경(燕京,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北京)의 옛 이름)에 있을 때 접근, 귀국할 때 한국에 따라와서 이내 서울 성밖에서 살다가 죽어, 그녀의 무덤이 고양(高陽)에 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인질로 있을 때 소현세자의 나이가 20대고, 또 굴씨도 묘령이었다.
명나라 사족(士族)의 딸인 굴씨의 저항과 역시 호국에게 붙잡혀온 이국(異國)의 왕자가 갖는 저항은 손쉽게 공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소현세자가 돌아올 때 동행해서 같이 올 만한 친근성은 그것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일 경우 망명(亡命)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간다.
사랑이다.
이 굴씨는 왕자의 법도를 위해 어떤 천한 사역인의 명분으로 조선에 와서 궁중에서 살다가, 귀국 후 2년 만에 세자가 죽자 깨끗이 몸을 간직하고 죽어갔을 것이다.
그녀의 일생은 고독했을 것이다.
혈연의 연고 없는 궁녀끼리는 그들의 사후(死後)를 위해, 계를 붇는 풍습이 있었다.
그리고 숨 돌릴 때 후배궁녀들에게 청명, 한식날 무덤 앞에 찬물이라도 떠 놓아 달라면서 울고 죽게 마련이다.
이 알려지지 않은 명나라 아가씨의 무덤은 당대 시인들의 낭만적인 시상을 자극하였고, 그리하여 이 앞을 지나는 사람들은 과묘시(過墓詩)를 짓고 싶었을 것이다.
여기 강릉 김 씨 김숙(金璹)의 굴씨 과묘시(過墓詩)를 옮겨본다.
풀은 엷은 비단치맛결 같고
꽃은 비녀꼭지 같네
언덕을 잘라 옥(玉)을 묻은지
그 몇몇 년 만인가.
해마다 한식(寒食), 청명(淸明) 날이면
오로지 궁아(宮娥=宮女)가
지전(紙錢)을 보내었기로
그것이 바람에 흩날릴 뿐이네.
그녀는 7세 때 궁에 들어갔으며 명나라의 제16대 황제 숭정제의 황후를 모시는 일로 첫 궁인생활을 시작했다.
명나라가 청나라에게 멸망하게 되자, 굴씨는 청나라의 포로가 되었다.
홍타이지의 이복동생인 도르곤이 굴씨에 미모에 반하여 굴씨를 첩에 삼으려고 했지만, 굴씨는 거부하였다.
도르곤은 굴씨를 죽이지 못하고, 병자호란 후 중국 심양에서 볼모로 잡혀 있던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환관 5명과 궁인 4명을 선물로 주었다.
굴씨는 조선에 와서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 씨를 모셨다.
소현세자가 조선으로 돌아온 지 두 달 만에 죽자 환국령을 내렸으나, 굴씨는 돌아가지 않았다.
굴씨는 소현세자가 죽자 여승이 되었으며, 자수원에서 지냈다.
굴씨는 소현세자의 아들 경안군을 평생 보살폈다.
굴씨는 나이 70세(1697년)에 죽었다.
굴씨는 조선 궁인들에게 자수와 중국어를 가르쳤다.
굴씨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