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韓末)에 되소금[胡鹽:호염]이라 하여, 청나라에서 밀수되는 식염이 나라안에 꽤 나돌았다.
재래염보다 한결 짜고 아울러 부피가 작기 때문에 소금이 소중한 산골사람들에게는 십상이어서 소금장수들은 살 판이 난 것이다.
그런데 춘천서 양구로 가는 소금길만은 이 되소금장수가 오갈 수 없었다.
소양강 건너 마작산(麻作山) 줄기의 뜨내리재 부침치(浮沈峙)를 넘어야 하는데, 이 되소금 짐을 지고 넘어가노라면, 뜨내리재가 떴다 내렸다 들쑥날쑥하여 소금짐을 뒤엎어놓고 만다고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호인(胡人)이 이 재를 넘는다면, 그 뜨내리의 조화 때문에, 머리가 돌아 발광하고 만다고도 구전되어 왔다.
그러기에 되소금이건 청인이건 호(胡)와 관계된 것이면 이 가까운 뜨내리재로 가질 못하고 두곱이나 더 먼 낭천(狼川) 길로 양구를 돌아가야만 했던 것이다.
반청주의(反淸主義)의 한국적인 저항방식을 이에서 또 하나 발견한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일이다.
춘천 교외에 살던 천인 이석을봉(李石乙封)에게는 "무작개"라는 젊고 용감한 아내가 있었다.
호란에 호병이 무작개를 붙들고 겁탈하려 하자, 무작개는 머리로 호병의 턱을 쳐받아 이를 분질러 놓았다.
그 징벌로 호병은 무작개의 머리가죽을 벌겋게 벗겨놓았다.
그리고 다시 대어 들자 호병의 국부를 두 손으로 붙들고 늘어졌다.
두 손이 잘리었다.
그리고 또 대어 들자 입으로 코를 물어 잘랐다.
무작개의 입이 부서졌다.
구전설화에 의하면 온몸이 잘리고, 부서지고, 촌단(寸斷)이 되었는데도, 살점이 도약하면서 반항했으며, 그 무작개의 뛰는 동체를 근처 굴속에 생매장하자, 그 인근의 땅이 들쑥날쑥 떴다 내렸다 했다 한다.
이것은 무작개의 집요하고 강인한 저항을 설화 속에 구제한 것이며, 당시 지배적이고 국민감정이던 반호주의(反胡主義)가 무작개가 묻힌 고개를 '뜨내리재'라 이름하고, 그 산을 '무작산(후에 마작산으로 전화)'이라 불러, 민족감정을 자연에다 체질화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비록 소금일지라도, 청나라에서 나는 것이면, 환영 속에서 배제를 하거나 보복을 함으로써, 그 한이 된 민족감정을 홀가분하게 한다.
적이면 나아가 싸우는 양성적 성향을 한 번도 못 누려온 약소한국은, 그같이 레지스탕스에 연고가 있는 자연물에 의지하여 음성적으로 싸워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