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현대시 감상

44. 꽃 덤 불

높은바위 2005. 6. 28. 09:15
 

44. 꽃 덤 불



  태양을 의논하는 거룻한 이야기는

  항상 태양을 등진 곳에서만 비롯되었다.


  달빛이 흡사 비오듯 쏟아지는 밤에도

  우리는 헐어진 성터를 헤매이면서

  언제 참으로 그 언제 우리 하늘에

  오롯한 태양을 모시겠느냐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이야기하며 이야기하며

  가슴을 쥐어뜯지 않았느냐?


  그러는 동안에 영영 잃어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영영 멀리 떠나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몸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맘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서른여섯 해가 지나갔다.


  다시 우러러보는 이 하늘에

  겨울밤 달이 아직도 차거니

  오는 봄엔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고

  그 어느 언덕 꽃덤불에 아늑히 안겨보리라.

 

                                  1956. ꡔ빙하ꡕ



  * 이 시는 조국이 광복된 후에 보인 혼란스러운 현실 속에서 미래의 밝은 세계가 도래하기를 갈망한 작품이다.

  앞 부분(1-3연)에서 시적 자아는 일제 시대의 수난 어린 삶을 회고하고, 뒷부분(4연)의 ‘태양을 안고 --- 꽃덤불에 아늑히 안겨 보리라’에서 시적 자아의 간절한 소망을 노래하고 있다. 이 시에서 ‘태양’은 말할 것도 없이 진정한 조국의 광복을 의미하는 것이며, 밝은 미래를 표상하는 것이다. 그리고 태양은 시적 자아가 궁극적으로 소망하는 가치이기도 하다.

  광복은 말할 것도 없이 빛의 회복을 뜻한다. 빛의 회복을 위해서는 태양이 다시 떠오르지 않으면 안된다. 일제 시대를 암흑기라 한 것도 태양이 없기 때문이다. 1연과 2연에서 태양은 조국의 해방을 의미한다. 2연 1행에서처럼 달빛이 비오듯 쏟아지는 밝은 밤도 그것이 밤인 한 어둠이고 암흑인 것이다. 그러기에 3연에서 저인 것과 같은 민족의 수난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이 수난은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고 꽃덤불에 아늑히 안기는 순간 끝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소망이 실현된 세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