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현대시 감상

161. 비가 와도 젖은 자는

높은바위 2005. 8. 4. 06:01
 

161. 비가 와도 젖은 자는

            巡禮 1

                           

                                 오 규 원

 

  강가에서

  그대와 나는 비를 멈출 수 없어

  대신 추녀 밑에 멈추었었다

  그 후 그 자리에 머물고 싶어

  다시 한번 멈추었었다

  비가온다, 비가 와도

  강은 젖지 않는다. 오늘도

  나를 젖게 해놓고, 내 안에서

  그대 안으로 젖지 않고 옮겨 가는

  시간은 우리가 떠난 뒤에는

  비 사이로 혼자 들판을 가리라.


  혼자 가리라, 강물은 흘러가면서

  이 여름을 언덕 위로 부채질해 보낸다.

  날려가다가 언덕 나무에 걸린

  여름의 옷 한자락도 잠시만 머문다.


  고기들은 강을 거슬러올라

  하늘이 닿는 지점에서 일단 멈춘다.

  나무, 사랑, 짐승 이런 이름 속에

  얼마 쉰 뒤

  스스로 그 이름이 되어 강을 떠난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

 

                     1972. 월간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