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났다
마지막, 늦은 손님을
문 앞까지 우리는 배웅했다;
안녕 - 그리고 나머지는
밤바람이 삼키었다.
집, 정원, 길,
열 배로 우울하게 펼쳐진,
나에게 음악을 들려준,
말씨들이 상냥한 곳.
그건 축제였으나
밀려오는 어둠과 함께였고;
그녀는 손님이었으나 -
그래서 지금, 그녀는 떠났다.
* * * * * * * * * * * * * *
* 헨리크 요한 입센(Henrik Johan Ibsen, 1828년 3월 20일 ~ 1906년 5월 23일)은 노르웨이의 극작가이자 시인이다.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역사상 가장 중요한 극작가 중의 하나로, 근대 시민극 및 현대의 현실주의극을 세우는 데 공헌하였다.
따라서 그를 "현대극의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텔레마르크주 시엔에서 태어난 입센은 암흑 같은 소년시절을 보냈다.
8살 때 부유한 상인이었던 부친이 도산하고 15살 때 그림스터라는 조그마한 읍의 약제사 조수가 되어 연상의 하녀에게 아기를 낳게 했다.
이 그림스터 시대가 입센의 성장기이다.
20세의 겨울, 입센은 첫 작품 <카틸리나>를 썼다.
고대 로마의 카틸리나에서 소재를 구한 시극(詩劇)으로서 1848년의 프랑스혁명에 자극을 받았음은 확실하나 작품의 테마는 오히려 빛과 어둠을 상징하는 두 여성에게 동시에 마음이 끌리는 주인공의 내적 갈등이라고 하겠다.
이 테마는 입센의 일생을 일관하고 있다.
이듬해 친구의 원조로 <카틸리나>를 자비로 출판하여 수도 크리스티아니아(현재의 오슬로)로 나왔다.
이 해에 쓴 1막 작품 <전사의 무덤>은 크리스티아니아에서 상연되었다.
의학에 뜻을 두고 크리스티아니아의 저명한 예비학교에 다녔으나 학업을 중도에서 포기하고 만다.
천성적으로 반항적인 성격이었으며 소년 시절의 역경으로 모진 고생을 했기 때문에 사회에 대해 어떤 소외감을 느끼게 되었다.
수도에서 입센은 갖가지 저널리스틱한 활동에 종사했으며 조합운동에도 관계하여 자칫하면 검거될 뻔하기도 했다.
이후 입센은 정치적 실제활동에는 일절 참여하려고 하지 않았다.
노르웨이에 있어서 입센의 명성을 높인 것은 희곡의 형식을 빌은 장편의 사상 시라고 할 수 있는 《브랜드(Brand, 1866)》와 《페르 귄트(Peer Gynt, 1867)》이다.
공상에 잠기며 거짓말에만 능숙한 건달 청년 페르는 청순한 소녀 솔베이를 사랑하나 그녀에게서 피하여 세계를 방황한 끝에 늙은 몸이 되어 다시 그녀 곁으로 돌아온다고 하는 5막물의 희극적 극시로서, 노르웨이 민화를 소재로 충분히 사용하였으며 노르웨이 국민의 초국가의식(超國家意識)에 대한 풍자는 신랄하기 이루 말할 수 없다.
이 두 작품에는 각기 제목과 동명의 주인공이 있는데 이 두 사람은 노르웨이인, 나아가서는 입센의 두 개의 다른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브랜드는 '전부냐, 아니면 전무냐'를 표방하고 모든 타협을 배격하며, 가족이든 나의 몸이든 모두를 희생하는 열렬한 목사이며, 페르귄트는 꿈같은 생활을 하고 큰소리만 탕탕치며 현실을 바르게 보지 않고, '우회로'를 좋아하는 '알맹이 없는 껍데기만의 양파'와 같은 사나이이다.
페르귄트는 《브랜드》의 주인공이었던 순교자적인 브랜드와는 정반대적인, 안이함만을 추구하는 노르웨이 국민의 전형(典型)으로 설정되어 있으나 작품의 주제는 양쪽이 모두 '자기에게 철저하다는 것이 무엇이냐'는, 입센의 일생을 일관한 인생문제라고 하겠다.
이러한 극시에는 훗날의 입센 작품이 지니는 요소의 전부가 싹트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래 <페르귄트>는 상연을 위해 쓰여진 것은 아니었으나 1876년의 초연은 그리그의 음악을 곁들일 수도 있고 해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입센은 《브랜드》를 일생의 최대 걸작으로 삼을 생각으로 썼으며, 《페르귄트》는 말하자면 그 반동으로 자연 발생적으로 성립했으나 오늘날에 있어서는 후자가 노르웨이 문학의 대표 작품으로 애독되고 있으며 또 가끔 상연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