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시/북유럽

덴마크:쇠렌 오뷔에 키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높은바위 2023. 3. 12. 07:39

 

천국으로 가는 시

 

삶의 끝에 서면

너희 또한 자신이 했던 어떤 일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하는 동안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뿐이다.

 

너희는 행복했는가?

다정했는가?

자상했는가?

 

남들을 보살피고 동정하고 이해했는가?

너그럽고 잘 베풀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했는가?

 

너희 영혼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무엇을 했는가가 아니라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알게 되고,

마침내

자신의 영혼이 바로 '자신'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 * * * * * * * * * * * * *  

 

* 쇠렌 오뷔에 키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 1813년 5월 5일, 덴마크-노르웨이 왕국 코펜하겐 ~ 1855년 11월 11일 덴마크 코펜하겐(향년 42세)]'쇠렌 키에르케고르', '쇠얀 키에르케고어' 등 많은 이름으로 불린다.

한국 키에르케고어 학회에서는 후자를 발음상의 이유로 적극 추천하나, 사실 전자가 더욱 널리 쓰이는 편이다.

한국 키에르케고어 협회는 비교적 최근인 2011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국립국어원의 덴마크어 표기 세칙에 맞는 표기는 '쇠렌 키르케고르'이다.

사실 Søren Kierkegaard에 대한 덴마크 원어 발음은 국제 음성 기호로는 [sɶːɐn ˈkʰiɐ̯ɡ̊əɡ̊ɒːˀ]로 옮겨지므로, 어느 쪽도 정확한 발음은 아니다.

다만 음운 구조 등을 보았을 때의 근사치적인 표준을 정해 두었을 뿐이다.

영어 발음은 [ˈsɒrən ˈkɪərkəɡɑːrd](소런 키어커가드)이다.

이렇게 발음이 어렵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키에르 케고르라는 식으로, 마치 키에르가 이름이고 케고르가 성인 것처럼 쓰는 사람들도 있는데, '키르케고르'가 하나의 성씨인 만큼 이렇게 쓰는 것은 틀린 표기라고 할 수 있다.



번역가 안정효에 의하면 이렇게 된 것은 이유가 있다고 한다.

처음 키르케고르의 저작이 한국에 소개되어 번역되었을 당시 이름을 '쇠렌'으로 표기하는지, 아니면 '쇠얀' 또는 '죄얀'으로 표기하는지에 관해 한바탕 논쟁이 있었고, 이 때문에 문학 관련 인사들이 가급적 키르케고르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생겼다고 한다.

그 때문에 '키에르 케고르'와 같은 잘못된 표기가 남발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키르케고르를 논문 주제로 잡고 쓰려는 대학원생들은 아무리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키르케고르 논문과 연구에 의아할 텐데, 과거 1950년대부터 키르케고르는 연구되었지만 그 표기가 키엘케골[...], 키르케고아, 키르케가드 등 이상한 방식으로 통일되지 않은 채 이어져서 그렇다.

찾아보고자 한다면 한국 키르케고르 연구자 표재명 교수의 《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부록에 상세히 있으니 참고하자.

 

키르케고르는 1813년에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7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키르케고르는 아버지가 57세, 어머니가 45살일 때 출생했으니 이른바 늦둥이라고 할 수 있다.



일곱 명이 모두 후처 소생으로, 전처는 자식이 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이 일곱 남매의 어머니는 본래 키르케고르의 아버지 집에 가정부로 있던 사람으로, 결혼한 지 다섯 달 만에 아이를 낳았다.

이런 사실은 워낙 양심적이었던 키르케고르의 아버지가 일생을 두고 괴로워한 고뇌 중 하나였다.



맏형 페테르는 후에 목사가 되었고, 둘째 형은 상인이 되었으나 젊어서 미국에서 객사하고 말았다.

또 하나의 형은 어린 시절에 학교에서 장난을 치다가 머리를 다치는 바람에 숨졌다.

누나 둘은 자라서 결혼을 했지만, 나머지 하나는 어릴 때 사망했다.



아버지가 여든두 살에 돌아가셨을 때, 남은 형제라고는 페테르와 쇠렌뿐이었다.

쇠렌 키르케고르와 함께 유일하게 살아남은 그의 형 페테르는 이후 루터교회 주교로 활동하였다.



키르케고르는 어머니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다만 회프딩은 '키르케고르의 어머니는 단순하고 명랑한 부인이었다.

쇠얀은 모친으로부터 쾌활한 성격을 물려받았으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음울함과 서로 조화를 이루지는 못했다'라고 말하고 있다.



쇠렌 키르케고르의 아버지는 근엄하고 지극히 신앙적인 사람이었으나, 그가 어린 시절 목동이었을 때 산 위에 올라가 주님을 모욕한 것에 대한 죄책감과 자신의 후처와의 비교적 부적절한 관계에 대한 생각이 그가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던 우울함과 뒤섞였고, 이는 키르케고르의 가정이 극도로 엄격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형성하여 쇠렌의 유년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코펜하겐 대학에서 <소크라테스에 주안점을 둔 아이러니 개념론(Om Begrebet Ironi med stadigt Hensyn til Socrates)>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1841년에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와중에 그는 1840년, 즉 1년 전 자신과 약혼을 한 10살 연하의 연인 레기네 올센에게 불과 1년여 만에 갑자기 파혼을 선언하고 베를린으로 공부를 계속하러 떠난다.

그의 갑작스러운 파혼에는 결혼에 대한 환멸,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을 위해서는 결혼과 사랑을 포기해야 한다는 생각 등이 깔려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끔찍한 고뇌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찾아야 하는 인간"으로 여겼다.



결별 이후 그는 여러 가명을 사용하여 각종 저작들을 내놓는다.

1843년의 <이것이냐, 저것이냐(Enten-Eller)>, <공포와 전율(Frygt og Bæven)>, 1844년의 <불안의 개념(Begrebet Angest)>, 1845년의 <인생길의 여러 단계(Stadier paa Livets Vei)>, 1846년의 <철학적 단편에 붙이는 비문학적 해설문(Afsluttende uvidenskabelig Efterskrift til de philosophiske Smuler)> 등의 주요 저작들은 모두 가명을 사용하여 출판되었으며, 그는 훗날 이 책들의 원저자가 자신임이 밝혀짐에도 불구하고 익명을 고수하였다.



이 시기의 저작들은 주로 헤겔을 비판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후 그의 저작과 관련된 논쟁 속에서 그는 한동안 가명으로 저술하는 것을 포기하기도 하지만, 결국 1849년의 <죽음에 이르는 병(Sygdommen til Døden)>이나 1850년의 <기독교의 훈련(Christelige Taler)>을 출판하던 시점에는 다시 가명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의 그는 기독교, 특히 당시 덴마크와 독일의 주류였던 루터교회의 비판에 집중하였다.



이후에 가명으로 책을 출판했던 것이 탄로 나면서 코펜하겐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게 되었다.

키르케고르는 나중에 코펜하겐 신문에 정기 연재 <기독교 세계 공격>을 투고하면서 자신이 가명으로 글을 쓸 수밖에 없던 이유와 함께 덴마크 기독교 사회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키르케고르는 평생 특정한 직업을 가진 적이 없으며,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유산을 전부 저술 활동에 사용하였다.



이후 그는 1855년에 42세의 나이로 거리에서 쓰려졌고, 척수병으로 사망했다.

한 달여 뒤에 목사로부터의 성만찬을 거절하고 불행으로 점철된 삶을 마쳤다.

그는 세상을 떠나면서 '폭탄은 터져서 불을 지른다!'라는 유언을 남겼으며, 이는 훗날 그의 철학이 재조명받으면서 현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