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에서
드높은 창공에서 달님이
손에 든 오색 찬란한 큰 부채를
잠시 방심한 사이
바다의 푸른 융단 위에 떨어뜨렸소.
건지려고 달님은 몸을 숙여
은빛 고운 팔을 내밀었으나
부채는 흰 손을 빠져나가
지나는 파도에 실려나갔소.
그대에게 부채를 돌리기 위해,
달님이시여, 천 길 물속에라도 뛰어들리다,
그대가 하늘에서 내려오신다면
이 몸이 하늘로 올라갈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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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 bord de la mer
La lune de ses mains distraites
A laissé choir, du haut de l'air,
Son grand éventail à paillettes
Sur le bleu tapis de la mer.
Pour le ravoir elle se penche
Et tend son beau bras argenté ;
Mais l'éventail fuit sa main blanche,
Par le flot qui passe emporté.
Au gouffre amer pour te le rendre,
Lune, j'irais bien me jeter,
Si tu voulais du ciel descendre,
Au ciel si je pouvais mont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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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쥘 피에르 테오필 고티에(Jules Pierre Théophile Gautier : 1811년 8월 30일 ~ 1872년 10월 23일)는 1811년 프랑스 타르브에서 태어나 1872년 뇌이세르센에서 사망한 프랑스의 시인, 소설가 및 문학 비평가이다.
고티에는 파리에서 그림을 공부하다가 낭만주의 문인들의 영향으로 문학을 하게 되었다.
소설과 시를 썼고, 잡지와 신문에 미술, 연극, 무용 비평을 게재했으며, 《르뷔 드 파리》의 편집장을 지내기도 했다.
1811년 8월 30일 타르브에서 태어난 테오필 고티에는 줄곧 푸른 산의 형상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었다.
고티에가 세 살 무렵 가족들은 파리로 이사를 갔다.
그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향수를 품고 새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놀랍게도 일찍, 고티에는 다섯 살 때 글을 읽기 시작한다.
그가 처음 가장 빠진 책은 《로빈슨 크루소》와 《폴과 비르지니》로, 이 책들에서 큰 인상을 받았다.
고티에는 이후 선원이 되길 꿈꾸었으며, 극장, 특히 장식 회화에도 흥미를 가졌다.
1820년, 아홉 살이던 고티에는 리세 루이르르랑의 반 기숙사생으로서 짧게 머물게 된다.
고티에의 부모는 아들이 기숙 생활을 하며 쇠약해지자, 3학기 초에 아들을 기숙사에서 빼냈다.
콜레주 샤를마뉴의 "통학생"이 된 것에 매우 행복해하던 고티에는 그곳에서 어린 제라르 라브뤼니(훗날의 네르발)와 조우하게 된다.
이 시기 고티에는 이국적인 언어로 자신을 매혹시킨, 후기 라틴 시인들에 대한 독특한 취향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고티에는 일 학년 때 생-탕투안 가에 자리 잡은 화가, 루이제두아르 리우(1790 -1855)의 화실에 드나들기 시작했으며, 이 무렵 그가 근시로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1829년 6월 27일, 고티에는 이후 자신의 문학 "스승"이 되는 빅토르 위고를 만나게 된다.
낭만주의의 승리를 확고하게 한 1830년의 《에르나니》 상연 때에 붉은 웃옷을 입고 고전파의 가슴을 서늘하게 했다는 장본인이다.
시집에는 고답파의 선구적 작품 《칠보와 나전》(1852년)이 있고 장편소설 《모팽 양》(1835년), 《미라 이야기》(1857년), 《대장 프라카스》(1863년 ~ 1864년) 등이 있다.
《모팽 양》에 붙인 서문은 예술의 사회적 효용을 부정한 것으로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중 · 단편소설도 많이 있는데, 어느 것이나 환상적으로 응고된 문체를 가지고 있다.
그의 비판은 문학으로만 한정하지 않고 연극, 회화에까지 미치고 있다.
더욱이 고티에의 공헌은 문장어의 어휘를 풍부히 하였고, 또 후배를 양성하여 큰 영향을 남긴 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