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시/프랑스

쥘 피에르 테오필 고티에(Jules Pierre Théophile Gautier)

높은바위 2023. 2. 5. 07:09

 

         비둘기

 

무덤이 있는 저 언덕 위에
푸른 깃털처럼 아름다운 종려나무가
머리를 쳐들고 있는데, 저녁마다 비둘기는
보금자리를 만들고 몸을 폅니다.

하지만 아침이면 그 비둘기는
목걸이를 빼놓듯이 거기를 떠나는데, 우리들은
푸른 하늘에 하얀 것이 날거나
멀리 어느 지붕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봅니다.

나의 영혼도 비둘기처럼 그 나무 위에 머무는데, 저녁때마다
희망의 상징, 비둘기는
새벽빛이 들자마자, 날개를 파닥거리며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 * * * * * * * * * * * * * * *

 

  Les colombes

Sur le coteau, là-bas où sont les tombes,
Un beau palmier, comme un panache vert,
Dresse sa tête, où le soir les colombes
Viennent nicher et se mettre à couvert.

Mais le matin elles quittent les branches ;
Comme un collier qui s'égrène, on les voit
S'éparpiller dans l'air bleu, toutes blanches,
Et se poser plus loin sur quelque toit.

Mon âme est l'arbre où tous les soirs, comme elles,
De blancs essaims de folles visions
Tombent des cieux en palpitant des ailes,
Pour s'envoler dès les premiers rayons.

 

* * * * * * * * * * * * * * * *

 

* 테오필 고티에(Theophile Gautier :1811-1872)는 소위 '예술을 위한 예술'의 주창자로 유명하다.

시인으로서는 처음에 낭만파의 색채가 농후했으나 차츰 감정의 시가에서 벗어나 지적이며 냉철한 파르나스파의 시가 넘어가는 과도기를 이룬다.

그는 프랑스 서쪽 국경 지대, 피레네 지방의 타르브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 부모와 함께 파리로 이주했다.

처음에는 루이 르 그랑 중고등학교를 다니다가 후에 샤를마뉴 중고등학교로 옮겼는데 여기서 제라르 드 네르발을 만나 친교를 맺는다.

젊은 시절, 빨간 조끼의 시인 고티에는 동창생 네르발과 젊은 화가, 시인들을 규합하여 전투적인 낭만파를 조직, 빅토르 위고의 깃발 아래 고전파 공격에 앞장섰다.

1830년 위고의 연극 <에르나니> 상연 첫날밤에는 빨간 공단 조끼에 녹색 바지를 받쳐 입고 긴 머리에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위고 편에 서서 소위 <에르나니>의 싸움을 승리로 이끈 일은 유명한 이야기다.

이 일은 당시의 고전파 인사들과 귀현신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데 충분했다.

 

이때부터 그는 그림을 버리고 문학, 특히 시에 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신문사에 들어가 예술과 연극 비평가로 기사, 잡문, 논설, 신문 단편 소설 등을 썼는데 여가를 내어 시도 썼다.

1830년에 발표한 첫 시집 <포에지>를 비롯하여 <알베르튀스>, <죽음의 희극>, <스페인>, 그리고 그의 대표 시집으로 <칠보와 옥성> 등이 있다.

형태와 색채를 즐기는 그는 또한 여행을 좋아하여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터키, 러시아 등을 두루 돌아다니며 이를 주제로 한 많은 풍물기와 시들을 썼다.

특히 이베리아 반도의 거칠고 햇빛으로 가득 찬 풍경과 스페인 화가들의 그림을 주제로 한 시들은 아름다운 소품들이다.

 

그는 원래 화가가 되려다 문학으로 옮긴만큼 시에서 시각을 중요시한 이미지스트이며 자연미보다 인공미를 만들어내는 것이 시인의 본질이라고 생각한 사람이다.

따라서 그는 시를 이루는 말과 형태를 깎고 다듬어 완성된 조형미를 만들어내는 데 전력을 다했다.

자기의 역작이며 중심 작품의 이름을 <칠보와 옥석>이라고 붙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마치 금은보석의 세공사와도 같이 작은 형상을 아름답게 갈고 다듬어 완전한 형태를 만드는 데 그의 노력을 바쳤다.

따라서 문학사에 있어 그의 공적은 낭만파의 조잡한 자연 묘사를 무절제한 감정 토로에서 벗어나 시가의 미에 인공적 미를 가하고 아름다운 형태미를 창조하는 역할을 한 데 있다.

또한 그는 문학에서 예술 이외의 모든 것 즉, 사상이나 정치, 도덕, 철학, 그 밖의 모든 유용성을 배격한 예술을 위한 예술의 주창자로 나섰다.

"아무것에도 쓰일 수 없는 것만이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유익한 모든 것은 추하다"라고 선언했다.

이 주장의 정당성은 차치하고라도 그의 이론과 실천은 의외로 많은 예술가와 문인의 호응을 받았고 또 보들레르, 방빌, 플로베르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보다 10살 아래인 보들레르는 이 이론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보들레르가 그의 유일한 시집 <악의 꽃>을 고티에 선생에게 바치고 그 헌사에서 그를 '완전 무결한 시인', '프랑스 문학의 마술사'라고 부른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나폴레옹 3세 제정 시, 고티에는 관보의 편집 책임자로 임명되고 생활도 나아졌으나, 1870년 보불 전쟁과 뒤이은 파리 코뮌의 충격으로 1872년 파리 근교에서 급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