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시/중국

중국시의 흐름

높은바위 2015. 6. 2. 10:25

 

 

중국문학의 꽃은 시였다.

그리고 중국에 있어 문학은 다른 모든 예술 위에 군림하는 왕자였다.

중국민족은 회화·서예·조각·건축·음악·무용 등의 분야에서도 훌륭한 업적을 이루었지만 그중에서도 언어와 문자에 의한 예술, 즉 문학에서 특히 뛰어났다.

그들은 그들의 문자인 한자(漢字)에 대한 자부심이 유난했다.

한자는 바로 그들이 쌓아올린 높은 문화수준의 상징이기 때문인 듯하다.

그래서 문학은 그중에서도 특히 시는 한낱 예술이 아니라 인간 생활에 필수불가결한 부분이 된 것이다.

글을 아는 사람은 모두 시를 읽고 또 지었으며, 글을 모르는 사람도 시를 듣고 노래했다.

벼슬을 하는 사람이나 하려는 사람이 모두 시인이었다.

그밖에 승려와 도사, 후궁과 기녀, 그리고 제왕과 귀족 가운데에도 시를 읊는 사람이 많았다.

 

<시경(詩經)>은 중국민족이 가진 최초의 시집으로 서기 전 5세기에 편집된 것이다.

<시경>에서 맨 처음 나온 것은 연대가 서기 전 12세기까지 올라갈지도 모른다.

<시경>의 시대는 희랍의 <일리아스>,<오디세이아>와 거의 일치할 것이다.

세계문학에 있어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이집트·헤브라이·인도의 고대문학을 꼽을 수 있겠지만, 그것들은 희랍의 고대문학까지 포함하여 문학의 흐름이 중간에서 고갈되고 말았다.

그러나 중국문학은 <시경>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3천 년 동안이나 끊임없이 계승·발전되어 왔다.

그 동안 그들이 문학의 언어로 사용한 한자는 그 문자표기·언어형태에 있어 기본적으로 변화가 없었다.

서기 전 8세기의 <시경>,서기 후 8세기의 당시(唐詩), 20세기 초 청나라 말엽의 작품은 모두 거의 같은 노력으로써 금일의 독자가 읽을 수 있다.

중국시가처럼 높은 수준, 많은 수량, 그리고 오래되고 또 끊임없는 역사는 세계의 시사 가운데 유례가 없을 것이다.

글자를 안다는 것만으로도, 과거 중국에서는 우월감을 가질 수 있었다.

고대의 귀족사회에서 문자는 당연히 귀족들의 독점물이었지만 당대(唐代) 중엽 이후 혈통에 의한 신분의 제도적인 구속이 풀리고 난 뒤에도 문자는 여전히 민중과 거리가 멀었다.

이러한 상황은 의무교육이 보편화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별로 변동이 없었다.

그날 그날의 생활에 쫓기던 민중은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또 의식에서 문자를 배울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문자는 자연히 지주나 관료의 자손들만 배우게 되었으며 송대(宋代) 이후에는 도시 상인의 자손이 여기에 끼일 수 있었을 뿐이다.

문자를 해득하는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에게는 관료가 되어 출세할 수 있는 특전이 주어졌다.

고급관료의 등용문인 과거의 시험과목은 대개 유가의 경전과 논문, 그리고 작시가 중심이었다.

그래서 지식인은 철학·정치·문학에 모두 참여치 않으면 안되었다.

시인이란 전문가가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식인이 곧 시인이었던 것이다.

 

공자의 가르침인 유가사상은 중국에서 실질적으로 최초의 통일제국인 한나라로부터 최후의 왕조인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정통이었다.

거의 모든 지식인은 이를 진리로 신봉했다.

그들의 이상은 사서(四書)의 하나인 <대학(大學)>에서 언명한 것처럼 “자기의 본원적인 덕성을 밝히고 이로써 민중을 새롭게 한다”는 데 있었다.

그것은 개인의 수양, 가정의 화목, 국가의 안정, 세계의 평화를 위한 단계적인 노력이 요구되었다.

그들이 관료가 되는 것은 그들의 유일한 생업인 동시에 그들의 이상을 실현키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기도 했다.

그들은 민중보다 우월한 엘리트로서 민중에게 봉사하는 관료가 되는 것이었다.

그들의 의식은 그렇게 작용했으며, 적어도 명분은 확실히 그러했다.

그들은 공인이었으니, 설사 이것이 가면이었다 하더라도, 개인적인 남녀의 애정은 정면으로 들고 나올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연애시를 쓸 수 없었다.

시가는 문학의 다른 장르와 함께 유가의 진리를 선양하는 방법이었다.

과거에 작시가 시험과목이 된 중요한 원인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공자의 시에 대한 높은 평가는 중국시가의 흥성과 관계가 있음을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동시에 수양·사교·정치에 대한 그 효능의 강조는 중국 시가를 딱딱한 도학자적인 문학관에 예속시키려는 부단한 시도의 원인도 되었다.

그러나 긍정적인 면에서 본다면 유가사상을 신봉하는 지식인의 본령은 사회시로 나타났다.

시인은 사회·정치 또는 모랄이란 것에 밀착되는 자세를 취하려 했고, 따라서 시를 통해서 사회·정치·인간에 대해 의미있는 발언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중국사상의 정면이 유가라면 반면은 도가(道家)다.

사회에 대한 개인의 책임을 강조한 유가와는 달리, 도가에서는 자연적인 개인의 완성을 추구했다.

중국사상계의 유일한 외래 요소인 불가도 이 점에서는 어느 쪽이냐 하면 도가에 가까웠다.

그들의 의식은 관료가 되어 정치에 참여하는 길보다는 자연에 묻혀서 인간의 본성을 때묻지 않게 지키는 것을 귀하게 여겼다.

그들도 처음 글자를 배울 때에는 역시 유가의 경전을 읽었고 좋으나 싫으나 그 영향을 받았던 것이므로, 글을 아는 지식인으로서 엘리트의 강한 자부심을 가진 점은 유가의 선비와 같았다.

그들에게도 아녀자의 풋사랑은 하찮은 것이었으며 연애시는 역시 쓸 수 없었다.

그들은 그들의 세계인 자연, 그리고 구속받지 않는 인생을 주제로 하는 낭만시를 썼다.

유가나 도가는 사상이 반대였지만, 연애시를 쓸 수 없는 엘리트의식에서는 같았다.

그러나 지식인으로서 연애시를 쓴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데카당스가 일어난 때이다.

어떤 완성된 형태가 난숙해져서, 지금까지 그 형태를 추진하던 원리가 이번에는 그 형태를 파괴하는 원리로 변하는 곳에 데카당스의 경계가 있다.

지금까지는 그것 때문에 뻗어나온 특색이 있어서 그것으로써 완성으로 향했던 것이지만, 완성을 맞이한 직후에 지금까지 가장 중요했던 원리가 오히려 그것 때문에 형태가 무너지는, 즉 내부붕괴를 가져온다는 것이 데카당스의 본질적인 이념이다.

이것은 어떤 장르에 대해서도 적용되는 것이지만, 당시(唐詩)의 경우에는 말기의 상징적이고 관능적인 시에서 남녀의 애정을 다룬 작품으로 나왔다.

같은 사정은 남조(南朝)의 관능적인 고시(古詩), 남송(南宋)의 상징적인 사(詞)에서도 뚜렷하다.

데카당스의 작품에도 걸작은 있지만 이것이 시가의 주류가 될 수는 없다.

 

중국 시가의 주류는 어디까지나 사회시와 낭만시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문자를 가지지 못한 민중은, 비록 유가의 교화를 받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가식을 필요로 하지 않으므로 보다 솔직한 감정을 지녔고 또 이를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남녀의 사랑은 어느 민족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예술의 영원한 주제였으니, 중국의 민중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은 가식 없이 사랑했고 또 그렇게 사랑을 노래했다.

그러나 민중이 부른 사랑의 노래는 데카당스의 상징적이고 관능적인 애정시와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그것은 단순하고 보다 건강한 것이었다.

문자를 모르는 민중은 거의 농민이었다.

과거 중국의 농민은 의류와 식량 등의 생산자로서 나라로부터 받는 혜택은 대개의 경우 보잘 것 없었지만, 언제나 나라를 위해서 땀 흘리며 세금을 물어야 했고, 또 피 흘리며 병역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위정자는 착취자로서 나타날 때가 많았다.

제왕과 귀족·관료는 사치생활을 향락하기 위해서 또는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민중의 부담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늘리기 일쑤였던 것이다.

민중들의 불평불만은 사회시로 나타났으니 <시경>·<악부> 가운데의 민요는 사랑의 노래와 함께, 전쟁과 빈곤의 괴로움을 호소한 작품으로 가장 큰 두 부분을 이루고 있다.

이른바 시인의 사회시는 민중의 그것과 차이가 있었다.

민중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이었으므로 보다 극렬하고 직설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시인은 민중과 통치자의 중간에서 사회의 부조리를 개선하려는 데에 중점이 있었다.

시인의 순수한 동정심과 예리한 관찰력은 민중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느꼈고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보았지만, 그 해결방법은 제왕에 대한 충성심을 전제로 하는 이른바 풍간(諷諫)에 의존했다.

그들은 온화하고 함축적인 표현을 즐겨 썼다.

그래서 민중의 사회시는 진실성이 뛰어나지만 시인의 사회시는 예술성이 두드러진다.

 

민중은 또한 중국 시가의 모체였다.

최근세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상대될 만한 외국과의 관계가 전혀 없었다.

중국의 주변에는 문화수준이 낮은 야만족이 있었을 뿐이므로 중국문화는 고립된 것이었다.

서양 같았으면 외국에서 받아들일 수도 있었던 새로운 것을 중국에서는 민중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시의 정신, 시의 형식도 모두 민중에게서 나왔다.

민중의 노래가 갖는 신선함과 진실함은 독자에게 호소력이 크나 아직 미숙한 점이 있으므로, 문자를 알고 교양이 있는 시인이 이것을 갈고 닦아서 예술적으로 완성된 시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예술적으로 완성된 직후 데카당스가 일어나 이것은 붕괴되기 마련이니 다시 민중의 창조력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민중은 문자를 해득하지는 못해도 하나의 새로운 시형이 완성될 때까지는, 그것이 아직 생명감이 충실할 때까지는, 그래도 감상할 수 있었지만 데카당스가 일어나면서 그 시형은 민중과 완전히 동떨어지게 된다.

민중은 자체의 요구로 인해서 새로운 시형을 찾는다.

당시(唐詩)가 극성했을 때 민중은 이미 사(詞)를 모색했고, 송사(宋詞)가 극성했을 때 산곡(散曲)을 모색했던 것이다.

중국 시가는 허구를 요하는 영웅이나 위인의 서사시가 아니었다.

시인 자신의 실제적인 경험, 특히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그것, 또는 인간의 일상생활을 감싸고 있는 자연을 포함해서의 그것을 노래하는 서정시였다.

그 가운데 유가의 시인, 사회참여의 의식을 가진 시인은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사회시를 썼고 자기의 감정은 우정시로 노래했다.

그리고 도가의 시인, 은둔생활의 의식을 가진 시인은 아름다운 자연과 자유로운 인생을 표현하는 낭만시를 썼고, 자기의 사상은 철리시로 노래했다.

그들이 시로써 읊은 대상은 달랐어도 거기에는 아직 민중이 감상할 수 있는 여지는 마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민중과 유리된 데카당스의 시가는 상징적이고 관능적인 탐미시였고 진실한 감정이 없는 영한시였다.

그래서 민중은 새로운 시가를 찾는 것이다.

중국 시가는 문언(文言)으로 쓰는 것이 원칙이었다.

문언은 입에서 귀로 전달되는 구어와는 달리 기록을 전제로 하는 특수한 언어다.

중국은 그 넓은 영토에 많은 인구가 살고 있어 방언도 복잡하지만, 3천년 이상 하나의 국가, 하나의 문화를 계승하고 있다.

그 원동력의 하나가 문언(文言)이요, 그것을 표기한 한자(漢字)라고 할 수 있다.

문언은 금세기 초엽까지 표준어로서 최소한도의 요구를 충족해왔던 것이다.

 

중국어 문언을 표기하는 가장 적합한 문자가 한자(漢字)다.

한자는 글자마다 형태(形)·발음(音)·의미(義)를 구비하고 있다.

그래서 의상문자(意象文字)라고도 하는 것이다.

한글이나 서양의 알파벳은 표음문자로서 의미는 애초에 없고 글자 수가 2·30에 불과하니 형태는 발음을 표시하는 단순한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자는 의미·발음이 있을 뿐만 아니라 무수한 형태가 있다.

<강희자전>에는 40,545자가 수록되어 있으며, <대한화사전>에는 48,902자가 수록되어 있다.

그 많은 글자의 형태는 복잡한 가운데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서예라는 특수한 미술까지 성립된 것이다.

중국 시가의 시각성은 서예의 대상이 되어 주련·족자·액자·병풍 심지어 부채에까지 올라 생활주변에 파고들었다.

특히 정사각형을 원칙으로 하는 한자의 자형은 대개의 경우 한 눈에 그 균제미를 보여주기도 한다.

중국 시가의 표현은 중국어의 독자적인 형태를 이용하여 독자적인 미를 형성했다.

단음절어와 고립어인 데에서 생기는 간결, 간결에 의한 명쾌, 또는 간결로 말미암은 암시, 명쾌한 암시를 강조하는 것으로 억양이 센 운율, 의상문자(意象文字)의 표기가 가져오는 복잡이 당연히 요구하는 조화가 그것이다.

 

중국 시사(詩史)의 황금시기는 당대(唐代)였다.

그러나 당나라의 시는 그 이전 2천년에 걸친 민중과 시인의 끊임없는 시도의 소산이었다.

선진시대(先秦時代)의 시경(詩經)·초사(楚辭)가 그것이고 한(漢)·진(晉)·남북조(南北朝)의 악부(樂府)·고시(古詩)가 그것이다.

당시(唐詩)의 높은 수준은 그 이후 1천년 동안 시인과 민중의 끊임없는 도전(挑戰)의 대상이었다.

송(宋)·원(元)·명(明)·청(淸)의 사(詞)와 산곡(散曲), 그리고 5언시·7언시가 그것이다.

 

중국 최초의 문자는 은(殷)나라의 갑골문(甲骨文)이다.

거북껍질과 쇠뼈에 새겨진 이 문자는 서기 전 1400년경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현재 약 3천 가지가 구별되며, 그중 약 1천 자는 정확히 판독되는데, 문자의 운용은 지극히 유치하다.

시가 따위를 찾을 수는 없지만, 원시적인대로 시가도 있었을 법하다.

태고시대에는 무용·음악·시가가 삼위일체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은나라 다음 왕조가 주(周)나라다.

시경의 시는 이때 나왔으니, 실지로 중국에서 최초의 시가가 된다.

다만, 시경은 일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서기 전 12세기로부터 서기 전 7세기까지 5백 년 동안에 걸쳐서 이루어진 것이다.

시경에서 가장 이른 부분은 제정일치 시기의 국가의식, 특히 종묘에 바친 종교시다.

그 다음 부문은 왕족, 귀족들의 여흥에 쓰인 연회시다.

민족영웅의 사적을 읊은 서사시 비슷한 것도 여기에 넣을 수 있다.

이상은 통치자·귀족의 시가인데, 그 나머지 부분은 민중의 노래다.

그것은 주나라가 이민족으로부터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동쪽으로 쫓겨난 때를 전후해서 나왔다.

전쟁이 빈번하고 생활고가 가중된, 그리고 민지가 깨어 이를 불평하게 된 시기에 민중은 사회시로써 그들의 괴로움을 호소했다.

민중의 애정시는 시경의 가장 늦은 부분이다.

애정시의 발생은 사실 종교시보다도 일렀을 것이지만 정치적·종교적인 효용면에서 중시되지 못했으므로 문자화가 늦었을 따름이다.

민중의 노래인 사회시와 애정시는 시경 가운데 가장 우수한 부분이다.

시경의 리듬은 4·4조로 소박하고 단조로운 것이지만 반복에 의한 끈질기고 힘찬 것이었으니, 고대의 참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시경의 형식은 그 단조로움 때문에 후대 시가에 직접 쓰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경의 정신은 공자에 의해 높이 평가되어 후대에 연면히 이어졌다.

 

초사(楚辭)는 시경보다 약 2백년 뒤에 나왔다.

시경은 단조로운 리듬에 실은 질박하고 사실적인 것이었지만, 초사는 활발한 리듬에 옮긴 기려하고 낭만적인 것이었다.

전자는 황하유역의 북국 시가였고, 후자는 양자강 유역의 남국 시가였다.

중국은 엄청나게 넓은 국토 탓인지 문화의 모든 면에서 북국과 남국의 성격이 잘 대조되는데, 시가에서는 그 첫 모습이 시경과 초사로 나타났다.

초사는 원래 무가(巫歌)에서 비롯되었으나 천재 시인 굴원(屈原)이 나오면서 위대한 작품으로 승화되었다.

그래서 초사는 곧 굴원의 작품이라고 연상될 정도다.

정열가인 굴원의 작품세계는 이상과 현실과의 갈등에서 빚어지는 개인의 고민을 다룬 것이었으며, 그 어조는 비분강개·자유분방한 것이었다.

이것은 초사의 남국적인 기풍과 합치되는 것이었으므로 마침내 초사의 특성으로 굳어졌다.

초사의 과장된 수사법은 한대(漢代)의 부(賦)에 직접 계승되었지만, 그 남국적이고 개인적인 서정시의 특성은 후일의 시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漢)나라는 실질적으로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이자 고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대제국이었다.

강력한 왕권과 정비된 제도로 제국의 표현은 화려했지만, 상대적으로 개인은 하찮은 존재가 되었으며 인간으로서의 비애를 느끼기 시작했다.

제후에게 영합하는 고급 문인은 부(賦)라는 문체로 그 공덕을 과장했고, 일반 민중과 무명 시인은 악부(樂府)와 고시(古詩)로 인생을 표현했다.

아직 미숙한 것이었지만 후자는 중세에 이르러 시사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므로 한대는 고대에 속하지만 이들 악부와 고시는 중세에 합쳐서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중국의 중세는 한나라가 멸망된 뒤로부터 시작되는데, 위(魏)·진(晉)·남북조(南北朝)의 분열 시기와 대당제국의 통일 시기로 양분된다.

한나라 말엽부터 혼란하기 시작한 사회는 이 분열기에 더욱 가중되었다.

인생무상을 느낀 그들의 시가는 악부·고시를 막론하고 모두 비애·우수의 기조 위에 쓰여졌다.

일찍이 서기 28년에 전래된 불교는 이때 극성했으며, 원래 난세의 철학인 도가사상도 이때 유행했다.

지식인의 의식은 도가의 무위사상을 위주로 하면서 불가의 염세사상과 유가의 계급사상·유명론(有命論)을 받아들인 것이다.

중세 전반기의 시가는 이러한 지식인의 고시와 소박한 민중의 악부로 대별할 수 있다.

 

악부(樂府)란 원래 음악을 관장하는 관청이었다.

거기에는 귀족의 노래—국가의 의식이나 연회의 여흥에 쓰인 것, 민중의 노래, 외국에서 수입된 것과 민간에서 채집된 것이 있었다.

그런데 시사에서는 이들 노래를 악부라는 이름으로 불렀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문학적인 가치가 높은 민중의 노래를 가리키게 되었다.

한대 악부 안의 민요는 시경 안의 민요처럼 사회시·애정시가 주류다.

남북조의 악부는 남조의 여성적인 세계와 북조의 남성적인 세계로 판이한 구별을 보여준다.

악부의 구법(句法)은 일정치 않으나 5·5조로 된 것이 많다.

5언시로 발전하는 과정의 한 단계일 것이다.

악부의 제도가 후대 시가에 끼친 공로는 지대하다.

민간의 노래가 문자화되고, 지식인과 접촉이 생기고, 지식인의 작품이 그 영향을 받아 평민화된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한·위·진·남북조를 지나 당대에까지 계속되었다.

 

고시(古詩)는 한·위·진·남북조의 시인이 쓴 시를 당나라 사람의 관점에서 일컬은 말이다.

그것은 같은 5언시·7언시였지만 당대에 완성된 율시나 절구(絶句)에 비교해서, 시구의 수·평측·압운의 규정이 보다 자유로운 것이었다.

당나라 사람은 이것을 고시(古詩), 그들의 율시·절구를 근체시(近體詩)라고 구별했던 것이다.

 

5언고시는 서기 전 1·2세기(漢前)에 시작되어 서기 후 1·2세기에 성립되었으니 무명 시인들의 고시 19수는 그 성립을 알리는 표지였다.

한편 7언고시는 위나라 때 시작되어 당나라 초기에 완성되었다.

남북조시대의 시인들은 중국어의 성조(聲調)가 시가의 음악성과 관계가 있음을 느끼고 이것을 응용하기에 전력을 바쳤으며, 또한 그들의 환경이 궁정·귀족의 살롱과 같은 것이었으므로 시가의 내용보다는 시가의 수사법에 관심을 기울였다.

 

남북조의 시가는, 특히 남조의 그것은 이러한 사정에서 탐미적인 방향으로 흘렀다.

그래서 이 시기의 중요한 시인은 현실적인 작풍으로 자기의 감정이나 사상을 표현한 시인들과 수사법에 심력을 쏟은 시인들로 대별된다.

한·위·진·남북조는 시어(詩語)로서의 중국어의 가능성을 철저히 모색한 시기였고, 철학적으로 자아를 발견한 시기였다.

이것은 당시의 찬란한 개화를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

 

당(唐)나라는 중국이 다시 한 번 이룩한 대제국이었다.

한나라가 멸망된 뒤 4백 년 동안 중국은 분열과 혼란의 연속이었다.

이른바 중원인 황하 유역에는 여러 이민족의 왕조인 북조가 도사리고 있었다.

이 시기에 중국문화는 외래적인 요소를 많이 흡수했고, 중국민족은 이민족과 적잖이 혼혈되었을 것이다.

중세적 통일국가인 당나라는 고대적 통일국가인 한나라와 이미 문화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다른 것이었다.

당나라에서는 그 이전 혼란기에 비뚤어졌던 인간성이 새롭게 고쳐졌다.

남조의 여성적이고 유순한 면과 북조의 남성적이고 과격한 면이 절충된 당나라 문화는 보다 자신감이 넘치고 다이내믹한 것이었다.

이 특질은 당시(唐詩)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당시(唐詩)는 중국 시가의 절정이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시가 가운데서도 뛰어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당나라 시인은 새로운 시형을 빌어 악부(樂府)·고시(古詩)를 번안했다.

남조에서 발달한 운율·대구의 수사법은 마침내 당대에 이르러 율시와 절구를 완성시켰다.

절구는 남북조 말기에 율시는 당나라 초기에 성립은 되었지만 그것이 예술적으로 완숙된 것은 이백(李白)의 절구, 두보(杜甫)의 율시였다.

당시는 시풍으로 보아 낭만시·사회시로 크게 나눌 수 있으며 여기에 데카당스의 작품이 뒤따른다.

 

낭만시는 복고파·산수파·악부파로 세분할 수 있는데, 3자를 통합한 이백(李白)이 그 대표다.

복고파는 시가의 허식을 배척하고 작가 개인의 생명과 감정을 담았다.

그들의 슬로우건은 복고였으나 실은 혁신이었다.

산수파(山水派)는 농촌과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렸다.

간결한 스케치로서 담담한 시풍을 조성했다.

악부파(樂府派)는 악부의 정신과 어조를 채택하고 운율을 포기했다.

변화자재한 구법(句法)으로써 국경지대의 풍경, 놀라운 전쟁 등 평범치 않은 인간을 소재로 삼았다.

 

그런데 이백(李白)은 복고파의 진실함을, 산수파의 담박함을, 악부파의 호탕함을 갖추고, 5언·7언의 장편·단편을 자유자재로 구사해서 노래했다.

그는 수백 년 동안 중국 시가에 겹쳐진 온갖 제한을 통쾌하게 분쇄하고 생명감 넘치는 새로운 격조를 완성시켰다.

 

두보(杜甫)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이백과 대조되는 시인이다.

이백이 그 이전의 시사를 총정리 했다면, 두보는 그 이후의 시사를 새로 전개 시켰다.

두보의 사회시는 안사의 난리와 직접 관련이 있다.

안사(安史)의 난리는 번영으로 치닫던 당나라가 쇠망으로 굴러 떨어지는 고비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중세가 근세로 옮아가는 전기였다.

이 비상한 체험이 두보를 자극하여 사회문제에 눈길을 돌리게 했다.

이백은 두보와 같은 시대에 처했지만 개성·사상·환경이 달랐으므로 의식도 감정도 달랐다.

이백은 자기를 깊게 높게 하는 데에서는 큰 성과를 거두었으나 국가나 사회에 생각을 두지는 않은 듯하다.

두보는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예술적으로도 완벽한 시가 되게 했으므로 중국 시사의 최고봉이 된 것이다.

두보가 완성시킨 사회시는 바로 백거이(白居易) 등에게 계승되었다.

그리고 이 전통은 청나라 말엽까지, 중국 고전시의 가장 중요한 흐름이 되었다.

중국의 시인은 마침내 진정으로 민중을 향하게 되었다.

이제까지는 시인·귀족이 자기와 지배층을 주제로 삼았던 것이나, 이제는 시인·지식인이 전 민중을 의식하게 된 것이다.

다만 백거이와 그 일파는 시의 정신에서는 두보보다 나은 점이 있을지 몰라도 시의 언어에서는 미치지 못했다.

한편, 두보의 시의 언어를 계승한 것은 한유(韓愈) 등이었다.

그들은 열심히 특이한 구법(句法)을 만들고 참신한 어휘를 찾아 새로운 시를 모색했으나, 결과는 난해하거나 시적 감흥이 모자라는 것이었다.

결국 백거이나 한유는 일급의 시인이긴 했지만 두보의 수준에 미치지는 못했다.

이백·두보의 수준은 아무도 넘어설 수 없었다.

시단에는 마침내 데카당스가 휩쓸었다.

이상은(李商隱) 등의 상징적이고 관능적인 애정시가 그것이다.

5언·7언의 고시·율시·절구로서는 더 높은 수준을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

시사(詩史)의 흐름은 오대(五代)와 송(宋)의 사(詞)로 넘어갔다.

당조의 멸망이 중세의 종언이었듯이 당시(唐詩)의 쇠퇴는 5언시·7언시의 종말이었어야 했다.

그러나 이백·두보를 위시해서 왕유·백거이·이상은이 이룩한 높은 수준은 당시의 형식을 영원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과거에는 여전히 작시(作詩)가 출제되었고, 유가의 문학관에 의해 중국 시가의 정통으로 계속 인정되었기 때문에 송대(宋代) 이후에도 모든 지식인이 이 시형으로써 작품을 내었다.

그리하여 5언시·7언시는 금세기 초 5·4문학 혁명 때까지 존립되어 왔다.

 

당나라가 멸망된 뒤 중국의 근세는 시작되었다.

근세의 시가는 사(詞)와 산곡(散曲)이 주류다.

사(詞)는 당시에 데카당스가 일어나자, 산곡은 사에 데카당스가 일어나자, 민중의 새로운 노래로서 마련된 것이었다.

사와 산곡은 5언시·7언시처럼 구법(句法)이 가지런하지 않다.

그것은 노래를 부를 때, 보다 자연스러운 리듬을 위해서다.

5언시·7언시도 일부는 노래로 부를 수 있었지만, 그것은 시가 있고나서 악공(樂工)이 작곡한 것인데 비해, 사(詞)와 산곡은 곡이 있고나서 여기에 맞춰 시인이 작사한 점이 다르다.

당나라 때 이미 외국 음악이 많이 들어왔지만, 이민족이 통치한 금(金)나라나 원(元)나라 때에는 더욱 심했다.

중국의 노래—유행가가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서 구법이 들쭉날쭉한 것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악부의 구법처럼 아무렇게나 된 것은 아니다.

사(詞)와 산곡의 장단구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는데, 이를 사패(詞牌) 또는 곡패(曲牌)로 지정한다.

사패나 곡패는 원래 곡조의 뜻이지만 가사—시에서는 구법의 장단을 규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같은 장단구지만 산곡은 사(詞)보다 구법의 변화가 더 풍부하다.

사(詞)는 처음 시정의 청루(靑樓)에서 불리웠던 서민의 노래였으나 곧 궁정이나 귀족의 연회에서 여흥으로 즐기게 되었다.

사(詞)를 본격적으로 지은 최초의 시인은 당나라 말엽의 온정운이다.

그러다가 오대(五代)의 두 왕궁을 중심으로 발전해 나갔다.

초기의 사(詞)는 단편이며 여흥적인 것이므로 개성을 찾기 어렵다.

다만 망국의 임금 이욱의 특수한 사정은 여기서 예외가 된다.

사(詞)는 송나라 때 크게 흥성했으나 그것은 이미 여흥이 아니라 송대시가의 대표가 된 것이다.

먼저 유영(柳永) 등에 의해 장편이 마련됨으로써 형식이 확장되더니 사(詞)는 여기서 시(詩)로서의 사(詞)로 받아들인 일파와 노래로서의 사(詞)를 받아들인 일파로 나뉘었다.

사(詞)는 원래 노래이지만 송나라 소식은 이것을 하나의 새로운 시형으로 받아들여 그 음률을 무시하면서까지 내용에 충실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주방언(周邦彦)은 사(詞)를 본래의 노래로 되돌려 그 내용보다는 음률을 까다롭게 따졌던 것이다.

남송(南宋) 이후로는 신기질(辛棄疾)이 소식의 기풍을 계승하여 사(詞)의 대가가 되었지만, 전반적인 면에서는 데카당스가 일고 있었다.

사(詞)의 종말이 온 것이다.

그 뒤로는 청나라의 나난성덕 등이 새로운 일면을 열었을 뿐이다.

 

산곡(散曲)은 여진족의 금(金)나라 치하에서 그 시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산곡(散曲)의 완성은 몽고족의 원(元)나라 때부터다.

군사적으로는 우수했으나 문화적으로는 후진이었던 몽고족의 지배 밑에 중국의 지식인은 설 곳이 없었으니 당시 10계급 가운데 제9계급으로 전락된 것이다.

과거 지식인은 그가 관료였거나 은자였거나 아무튼 엘리트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창녀나 거지와 같이 취급되었다.

과거가 실질적으로 철폐되고 지식인의 유일한 생업인 벼슬길이 막혔다.

지식인의 일부는 극장에서 잡극(雜劇)을 썼고 청루에서 산곡(散曲)을 지었다.

잡극과 산곡은 문자의 성질에서는 같으므로 함께 원곡(元曲)으로 통칭되기도 하지만 문학의 성질에서는 달랐다.

잡극은 희곡이고 산곡은 시가다.

사(詞)와 산곡(散曲)은 모두 서민의 노래에서 시작되었으나 사(詞)는 일찍부터 궁정과 그 주위의 고급문인에게 채택되었으므로 전아한 것이 되었지만 산곡(散曲)은 오래도록 통속적임을 면치 못했다.

그래서 오늘날 고전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내릴 때까지 산곡(散曲)은 정통 문학으로서 평가되지 못했으나 중국고전의 집대성인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되지 못했다.

산곡(散曲)은 형식이나 기풍으로 보아 북곡(北曲)과 남곡(南曲)으로 나눌 수 있다.

북곡(北曲)은 금나라 때 이미 시작된 것으로 기풍이 호방한데 남곡(南曲)은 원나라 때 처음 나온 것으로 기풍이 청려하다.

중국 고전시가 가운데 최후의 시형인 산곡(散曲)은 역시 중국 서정시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당시(唐詩)의 절정을 지닌 5언시·7언시는 근세에도 많은 사람의 창작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송대에는 당시(唐詩)의 세계와는 다른 송사(宋詞)의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했다.

그러나 그 이후는 모방시대였으니 문자 그대로 천편일률이었다.

다만, 국가의 흥망이라든가 하는 대변동시기에는 예외적으로 걸출한 작품이 나왔다.

실지회복에 애태우던 남송시기에, 금·원 교체기에, 원·명 교체기에, 명·청 교체기에, 그리고 청나라의 멸망, 아니 중국적인 전통의 붕괴를 눈앞에 두었을 때에 훌륭한 시인이 나왔다.

그처럼 큰 자극만이 매너리즘을 극복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중국의 근세문학은 이미 산문·희곡·소설이 주류가 되었다.

그것은 또한 문언(文言)에서 구어(口語)로 문학의 언어가 바뀐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에서도 중국 서정시가의 뿌리 깊은 전통은 사(詞)와 산곡(散曲)의 새로운 시형을 낼 수 있었고, 5언시·7언시에서도 걸작을 낼 수 있었다.

당대(唐代)의 시를 중국 시문학의 정상으로 삼는 것은 벌써 약 1천년 이전부터의 일이다.

중국문학은 여러 가지 양식이 있지만 3천년의 긴 역사를 통하여 시만큼 가치 있고 명맥이 길었던 문학은 없었다.

사부·고문·소설·사곡 등 많은 장르가 있었지만 모두가 몇 백년 동안 빛나고 시들었거나 문학사상의 유물로 화하고 마는 것이다.

 

고문은 한유가 복고운동을 제창하여 이후 1천여 년 동안 명맥을 유지하였으나 여러 차례의 반대에 부딪혔을 뿐더러 이것은 일반적인 문장이지 순수 문학으로 간주할 수 없으며 문학으로서의 가치도 시에 비하면 멀리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현대문학에서는 현대소설이 최고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중국에서는 과연 과거의 시처럼 오랜 세월을 변함없이 그 지위를 누릴 것인지는 의문이다.

말할 것도 없이 시는 과거의 중국문학에서 정통으로 치는 것이다.

그런 시문학 중에서도 당대(唐代)의 시가 정상을 차지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론이 없다.

 

당(618-907)나라 왕조는 중국의 역사상으로도 고대의 여러 가지 제도가 여기에서 끝나고 근대로 옮아오는 가지가지 현상이 뚜렷하여 이것을 고대의 종언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태종이 시도한 중앙집권제는 1백여 년이 지나자 퇴색하였으며 농민들에게 비교적 고루 나누어 주었던 토지균전제도, 이와 때를 같이하여 무너져서 점차 귀족과 대지주들의 수중에 들어가 농민들은 땅을 팔고 장원의 고용인으로 몰락하거나 심지어 산중으로 들어가 도적이 되는 이농현상이 일어난다.

사회의 모순은 덩어리로 쌓여 마침내 755년 안록산의 반란으로 폭발하여 8년 만에 난은 일단 평정되지만, 근본적인 중흥은 이룩하지 못하고 대제국은 황혼이 들기 시작하여, 왕조의 번영이란 지난날의 꿈이 되고 만다.

지방의 통치를 맡아 할거한 번진들은 명령을 듣지 않았으며, 중앙은 중앙대로 환관과 관료들이 당쟁을 벌여 마침내 농민폭동인 황소의 난을 자초하여 대당제국의 운명은 끝장이 나는 것이다.

당나라 시는 바로 안록산의 난을 전후하여 꽃을 피운다.

이 시기를 성당이라 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이전을 초당, 이후를 중당·만당이라 한다.

왕안석·소식·황정견은 모두 11세기 후반, 즉 당나라 다음 왕조인 북송의 중간시기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자부하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모두 두보를 고금미증유의 시인으로 치며, 그 존경은 두보를 중심한

당시의 시인들과 일반에까지 확대되는 듯하다.

이들 북송 시인들은 그들의 시가 왕왕 당시에는 없는 사물의 이치를 따지는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을 느끼고는 그것을 시대의 변천에 따르는 필연의 결과라고 시인하면서 보다 원만한 시가 이전인 당나라 시대에 있었던 것을 역시 어찌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로서 인정하였다.

그리하여 당시를 영원히 보급되어 갈 가치가 있는 존재, 즉 고전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왕안석의 당백가시선(唐百家詩選)은 아마 이상과 같은 생각에서 만든 선본일 것이며 오늘에 전하는 당시선본 중 가장 오래된 것의 하나이다.

남송 이후로는 당시를 고전으로 삼는 경향, 특히 이백과 두보를 중심으로 하는 성당의 시를 숭상하는 태도는 더욱 명백해진다.

엄우(嚴羽)가 창랑시화에서 확실한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성당의 여러 사람은 한결같이 흥취가 있다.

산양의 뿔을 뽑은 것 같이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리하여 그 묘한 곳은 투철영롱하여 침체한 곳이 없다.

공중의 소리, 수중의 달, 거울 속의 모습, 말은 다하였으나 뜻은 다하지 않는다.”

그는 또 이어 송대 시인들은 이런 묘미가 없다고 한다.

명대에 오면 움직이지 못할 정설로 정착하게 된다.

 

중국 최후 왕조인 청대에는 생활에 밀착한 시로서 송시를 숭상하기도 하였으나 그렇다고 당시를 과소평가하는 일은 없었으며 당대의 시를 시의 황금시대로 치는 인식은 변하지 않았고 오늘의 중국에도 이것은 똑같다.

 

우리나라에서도 중국과 같은 상황이었다.

삼국시대 때 한문이 전해진 이래 고려·조선조를 내려오면서 당시, 그 중에서도 성당, 성당에서도 두보를 조술하였다.

고려말에서 조선조에 들어오며 소식을 모방하다 되지 않으니 황연견을 모방하였지만 그것은 중국의 청대사람들과 같이 송시를 조종으로 삼아서 한 일은 결코 아니다.

어디까지나 당시를 시의 정상으로 인정하고 난 뒤의 일인 것이다.

이백은 민중들 사이에는 특히 친숙한 존재로 ‘이태백이 놀던 달아’라는 민요를 남겼다.

그러나 식자들 간에는 반드시 그러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당시의 중심인물로는 두보를 친다.

우리나라 구시대는 한문이 판을 치던 시대라 중국책을 그분들은 바로 읽었다.

그러나 두시만은 번역본(두시언해(杜詩諺解))을 25권 17책이란 방대한 것으로 출간하였던 것이다.

 

당시가 중국 시의 역사상 이와 같이 절대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시경(詩經)> 이래 1천년 이상의 역사를 거듭한 시의 흐름, 즉 감정의 연소를 운율있는 언어로 표현하는 그런 경향의 흐름이 당대에 와서 비로소 완전한 표현능력을 얻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형식의 문학적인 완성이 후기의 중국에서는 다시 반복되기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운율을 완성하였다.

육조시대까지의 시에 비하여 새로운 시형을 두 가지 방향으로 개척하고 완성하였다.

그 하나는 운율이 자유로운 5언시 혹은 7언시, 말하자면 고시가 매우 길어진다.

짧은 시로서의 형태는 이전부터 있었기 때문에 고시라고 하지만 수백자에 이르는 장편시는 당나라에 들어와 현저하다.

이것은 시가 단지 한 찰나의 감정의 연소를 노래하는 것만 아니라 어떤 주장을 가진 사상을 노래하게 된 동기와 관계가 있어서 정연한 사상, 복잡한 사상을 노래하기에 적당하였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짧은 형의 시가 정교하고 세련된 것이다.

 

8행의 시인 율시, 4행의 시인 절구가 5자 혹은 7자인 구중의 낮고 높은 사성론 규격이 있어서 운율이 엄연한 시형이다.

이것은 6조 말기에 사성론(四聲論)이 나와 모색되어온 치밀한 시형의 결론이지만 초당 시절에는 명석에서의 즉흥시였던 것이 두보에 와서 이 시형에 대한 세밀한 감정을 담는 데 성공하여 이후의 시인들이 모방하게 되었다.

 

또 율시의 구성요소는 주로 대귀다.

이전 시의 대귀는 대략 같은 일들의 되풀이여서 싫증을 갖게 하나 두보는 이들을 서로 비교하거나 결합하여 천변만화하여 이와 같은 구속이 대시인에 있어서는 오히려 시인을 속박하지 않고 고무하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을 증명한다.

요컨대 자유를 욕망하면 어디까지나 자유분방하게, 세밀한 응집을 요구할 때는 어디까지나 치밀하게 노래하여야 할 운율형식을 당나라 사람들은 완성한 것이다.

물론 당시의 평가는 어디까지나 그 내용에 근거를 두는 것이다.

내용이 우수하지 않고는 그 내용이 갖는 사상성이 절대적일 것이다.

두보·백거이·한유 모두가 하나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소극적이 아니고 그들은 적극적인 주장자였다.

이백도 예외는 아니다.

왕적진자앙이 초기의 사상 시인이며, 그 뒤를 이어 이백과 두보가 나고 그 뒤를 한유와 백거이가 장식한다.

이전에도 원적 도연명과 같은 사상있는 시인이 있지만 육조의 시가 일반적으로 갖는 사상이란 소극적이다.

그들은 인간이란 불완전한 존재로 인식하여, 인간의 노력을 넘은 운명의 지배에 굴복하는 덧없는 존재로 생각하는 경향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회의적이고 절망적이었다.

그러나 당나라 사람들은 벌써 그렇지 않다.

그들은 전진적이다.

인간이란 한없는 운명의 희롱을 받아 좌절될 수 있는 것을 그들은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은 전진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개인적인 전진만이 아니다.

사회전반의 전진이 더욱 중요하였던 것이다.

두보는 바로 그 대표였다.

두보의 시는 정말 비수에 차 있다.

그 비수는 개인으로서도 사회로서도 전진의 가능성을 믿는 데에도 불구하고 그 전진이 방해당하는 데서 우러나온 분노인 것이며 동시에 서러움일 따름이다.

또 이백은 쾌락을 지나치게 노래하는 듯하나, 그가 쾌락을 노래하는 것은 종전의 시인들과 같이 현실을 도피하려는 소극적인 이유에서만은 아니다.

쾌락을 인생의 충만감으로 보는 적극적인 면이다.

이러한 적극성이 바로 두보와 통한다.

뿐만 아니라 한유·백거이에 이어져 동시에 당나라 시에 나타나는 보편성인 것이다.

이와 같이 당시는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사상을 담고 있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다.

그들은 시를 위하여 필사적이었다.

시구를 구하여 전 정열을 불태우며 생명까지도 던질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던가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두보는 모든 것을 자신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였다.

세상사고 자연이고 그의 눈은 항상 현실의 이면까지 시찰하는 것이다.

자연에 대하여 말하면 종래의 시인들과 같이 자연을 주어진 대상으로서 수동적으로 묘사하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능동적으로 주어진 자연에 무엇인가를 부여한다.

아니면 스스로 새로운 자연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때때로 거기에 부여된 것은 세상사의 상징으로서의 자연이 갖는 의미였다.

이백은 그의 천재와 소질,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낭만과 정열을 자연에 붙여 혼연일체로 불태우는 것이다.

두보는 자연과 사상을 그의 시 속으로 끌어들여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당시 일반이 갖는 취향인 것이다.

시인들이 각각 자기 나름대로의 사상을 가졌고 그것을 실천 내지 호소하려는 주장이 시에 강렬하게 묘사되는 것이다.

따라서 각각의 개성이 숨김없이 드러나 있어서 두보시는 어디까지나 두보, 백거이는 어디까지나 백거이 자신의 시를 완성하는 것이다.

만당에는 시의 기운이 쇠퇴하여 천편일률로 흘러 벌써 당시는 의무를 다하고 말려는 징조였다.

이후 송시, 원·명·청시는 그대로 당시의 격식에 새로운 시대의 여러 가지 사상만을 담아 노래하지만 당시가 차지하는 비중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